한산대첩, 목동 김천손의 보고로 승리 이끌어
명량대첩, 탐망군관 임중형의 정보보고로 대처
외교안보 무능 사령탑, 풍전등화 위기!

한산대첩, 목동 김천손의 보고로 승리 이끌어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1592년 임진년 7월 8일 한산대첩은 한 탐망꾼의 정보에 기초한 것이다. 그해 5월 29일에 2차 출동한 조선 함대는 6월 10일까지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지에서는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7월 들어 일본 수군은 일본 육군에 호응하여 가덕도와 거제도 부근에서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함대를 이루어 서진(西進)하고 있었다. 일본은 초기 해전의 패배를 만회하고 제해권을 재차 장악하고자 병력을 증강하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제1진 70여 척은 웅천(熊川)에서, 부산포의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의 제2진은 40여 척을,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도 합세하였다.

한산대첩에서 응용된 학익진 포위전법.
한산대첩에서 응용된 학익진 포위전법.

이에 이순신 장군은 7월 5일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함께 전라 좌우도 전선 48척을 본영이 있는 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한 뒤 6일 당포로 출전했다.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함선 7척이 합세하여 연합수군의 전력은 55척이 되었다.

7월 7일 저녁 조선 연합함대는 당포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이때 목동 김천손(金千孫)에게서 일본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 73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견내량(見乃梁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접했다.

견내량은 거제도와 통영만 사이에 있는 긴 수로로 길이 약 4km에 폭이 넓은 곳도 600m를 넘지 않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이 운신하고 전투를 벌이기에 좁은 해협이었다. 그러나 한산도는 거제도와 통영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툭 터져 외양으로 나아가기 용이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유인(誘引)전술을 세웠다. 선발대인 대여섯 척의 조선 함대를 발견한 일본 수군은 그들을 뒤쫓아 한산도 앞바다에까지 이르렀고 대기하던 조선 함대가 갑자기 배를 돌려 학익진(鶴翼陣)을 펼쳤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지자(地字), 현자(玄字) 등 각종 총통을 쏘면서 돌진하였다. 그 결과 중위장 권준(權俊)이 일본수군의 대장선인 아타게 부네, 층각대선(層閣大船) 한 척을 나포한 것을 비롯해 왜선 47척을 불사르고 12척을 나포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뒤에서 독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했다. 격전 중 조선수군의 사상자는 다소 있었으나 전선의 손실은 없었다. 한산도로 도망친 와키자카 휘하의 병력 400여 명이 먹을 것이 없어 13일간 해초를 먹으며 무인도에서 떠돌다 뗏목으로 겨우 탈출하였다. 마나베 사마노조는 자신의 배가 불타 바닷속으로 가라앉자 섬에서 할복했다. 이것이 세계 해전사에 기록된 그 유명한 한산대첩이다.

선용병자 선위불측 패적괴기소지(善用兵者 先爲不測. 敗敵乖其所之). 즉 “용병을 잘 하는 자가 먼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면 적이 가는 방향을 어그러뜨릴 수 있다.” 중국 당나라 때 이정(李靖)이 지은 병법서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에 나오는 말이다. 무경칠서(武經七書) 중의 하나로 이순신이 무과시험 공부할 때 달달 외운 서적이었다.

일개 목동 김천손의 탐망보고에 따라 전투의 승패 결과는 확연히 갈렸다.

이순신 장군의 주도 23전 23승의 주요 비법은 탐망 정보력이 뒷받침했다.
이순신 장군의 주도 23전 23승의 주요 비법은 탐망 정보력이 뒷받침했다.

명량해전, 탐망군관 임중형의 정보보고로 대처 

1597년 정유년 9월 16일 명량해전이 일어났다. 이 해전이 일어나기 전 이순신은 13척의 판옥선으로 대규모 일본 함대를 대응할 수밖에 없는 중과부적의 열악한 상황이었다.

1597년 9월 7일 난중일기다.

“바람이 비로소 멈췄다. 탐망군관 임중형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55척 가운데 13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도착했음’이라고 해서 각 배에 엄중히 알려 경계했음. 오후 4시쯤 적선 13척이 곧장 우리 배를 향하여 왔음으로 우리 배들도 닻을 올려 바다가 나가 맞서 공격하니 모두 돌아가 버렸음. 이날 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며 이르기를, ‘오늘 밤에는 아무래도 적의 야습이 있을 것 같다. 여러 장수들은 알아서 준비할 것이며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군법으로 다스리겠다’고 했음. 밤 10시쯤 적선이 포를 쏘며 기습공격해왔음. 우리 배들은 겁을 집어먹은 것 같아 다시금 엄명을 내리고 내가 탄 배가 곧장 적선 앞으로 나아가 지자포를 쏘니 강산이 진동했음. 적의 무리는 당해내지 못하고 4번이나 왔다갔다 하다가 물러갔음. 이들은 전에 한산도에서 승리(원균의 칠천량 패전)를 얻은 자들임.”

명량해전 발발 이틀 전인 1597년 9월 14일 난중일기다.

“맑음. 북풍이 크게 불었다. 진도 벽파(碧波)의 건너편에서 연기가 올랐기에 배를 보내 실어오게 했더니 다름 아닌 임중형이었다. 정탐한 내용을 보고하기를, ‘적선 200여 척 중 55척이 이미 어란포(해남)에 들어왔다’고 했다. 아울러 적에게 사로잡혔다 도망쳐 온 김중걸의 말도 전해 주었다. 왜놈들이 한밤중에 의논하기를, ‘조선 수군 10여 척이 우리 배를 추격해 쏘아 죽이고 배를 불태운 것은 너무 분하다. 각 처의 배를 불러 모아 합세해 조선 수군을 섬멸해야 한다. 그런 뒤에 곧바로 경강(京江 한강)으로 올라가자!’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만, 혹시나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생각되어 곧바로 우수영쪽으로 전령선을 보내 피난민들에게 알아듣게 타이른 뒤 급히 육지로 올라가도록 하였다.”

드디어 9월 16일 명량해전이 벌어졌다. 전라도 남쪽 바다 끝 해남과 진도 사이 울돌목에서였다. 13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일본 함대를 막아냈다는 믿을 수 없는 신화(神話)가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동원된 조선 판옥선 13척이 한꺼번에 133척을 막았다는 뜻은 아니다. 물목이 좁은 울돌목에 왜군은 선발대 31척을 먼저 보냈다. 그 31척이 모두 격침 또는 분멸당했다. 그러자 후방에 포진해 있던 나머지 왜선은 황급히 등을 돌려 꽁무니를 뺐다.

울돌목의 다른 이름은 명량(鳴梁)이다. 울 명(鳴)에 다리 량(梁). 명량수로는 해남군 화원반도와 진도군 군내면 사이에 있는 협수로이다. 남해에서 서해로 가는 요충지이다. 현재 진도대교가 놓여있다. 그 다리 아래에서 장군은 세계해전사상 기적(奇跡)과 같은 신화를 만들어냈다. 최근 몇 년 동안 명량대첩 재현행사 취재차 그곳을 몇 번 찾았던 필자는 진도대교 위에서 눈과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바다 물길 가운데 굽이치는 소용돌이는 웅웅웅 물소리를 내며 소용돌이를 치며 빙빙 돌아 흘러 내렸다.

밀물과 썰물 때 남해와 서해의 바닷물이 암초와 암벽에 부딪치면 용트림이 노도(怒濤)처럼 일어났다. 당시 멀리 이십리 밖에서까지 ‘바다의 울음’이 들렸다고 한다. 울돌목의 폭은 만조 때는 325m(수심 20m), 간조 때는 280m로 최대 유속은 10.4~11.6노트(knot, 1노트는 1.85km/h)다. 그런데 울돌목에서 암초 때문에 실제 항해 가능한 물폭은 약 120m이고 평균 유속은 9.5노트이다. 탐방 때 물길을 이용하는 조력발전소가 진도 벽파진 쪽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일단 아군에 유리한 전장 환경을 만들어 놓은 다음에 장소와 시간을 정하는 주동권을 쥐고 싸우는 선승구전(先勝求戰) 전략을 구사했다. 이 전략의 기본은 치밀한 정보전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적을 알고 우리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병가(兵家)의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불태(百戰不殆)를 장군은 굳게 믿고 있었다.

“1597년 9월 15일. 맑음. 밀물 때에 맞춰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수영(右水營)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정 뒤에는 명량(鳴梁)이 있는데, 적은 수의 수군으로 명량을 등지고 진을 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였다. 병법에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했고, 또 ‘한 명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 일부당경 족구천부)’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너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즉시 군율로 다스려 한 치도 용서치 않을 것이라며 거듭 엄하게 약속했다. 이날 밤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패할 것’이라고 알려줬다.”

드디어 명량해전 당일을 맞았다.

해남과 진도 사이의 울돌목에세 벌어진 명량대첩 해전 재현장면.
해남과 진도 사이의 울돌목에세 벌어진 명량대첩 해전 재현장면.

1597년 정유년 9월 16일.

“맑음. 이른 아침에 별망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명량을 거쳐 곧장 진을 친 우수영으로 향해 온다’고 했다. 곧바로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게 하니 적선 130여 척이 우리의 배들을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스스로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대하는 형세임을 알고 회피할 꾀만 내고 있었다. 우수사 김억추(金億秋)가 탄 배는 이미 2마장(약 90m) 밖에 있었다. 나는 노를 재촉해서 앞으로 돌진하여 지자, 현자 등의 총통을 이리저리 쏘니 탄환이 나가는 것이 바람과 우레 같았다. 군관들은 배 위에 빽빽이 들어서서 빗발처럼 난사하니, 적의 무리가 저항하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했다.

그러나 적에게 몇 겹으로 포위되어 형세가 장차 어찌 될지 헤아릴 수 없으니, 온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이 질려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아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더욱 심력을 다해서 적을 쏘라’고 했다. 여러 장수들의 배를 돌아보니 먼 바다로 물러가 있고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려 하니 여러 적들이 물러간 것을 이용해 공격할 것 같아서 나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호각을 불게 하고 중군에게 명령하는 깃발을 세우고 또 초요기(招搖旗 장수를 부르는 깃발)를 세웠더니 중군장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점점 내 배에 가까이 왔는데, 거제현령 안위의 배가 먼저 도착했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안위를 부르며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들 어디 가서 살 것이냐’고 말했다. 그러자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진하여 들어갔다. 또 김응함을 불러서 말하기를, ‘너는 중군장이 되어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피할 것이냐.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적의 형세가 급하니 우선 공을 세우게 해 주겠다’라고 하였다. 두 배가 먼저 교전하고 있을 때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2척에 지령하니 일시에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어서 기어가며 다투어 올라갔다. 이에 안위와 그 배에 탄 군사들이 각기 죽을힘을 다해 혹은 능장(稜杖 몽둥이)을 잡고 혹은 긴 창을 잡고 혹은 수마석(水磨石 반들거리는 돌) 덩어리를 무수히 난격하였다. 배 위의 군사들이 거의 힘이 다하자 내 배가 뱃머리를 돌려 곧장 쳐들어가서 빗발치듯 난사하였다. 적선 3척이 거의 뒤집혔을 때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잇달아 와서 협력하여 사살하니 왜적이 한 놈도 살아남지 못했다.

항복한 왜인 준사(浚沙)는 안골에 있는 적진에서 투항해온 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바다를 굽어보며 말하기를, ‘무늬 놓은 비단옷 입은 자가 바로 안골진에 있던 적장 마다시(馬多時)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무상(無上) 김돌손을 시켜 갈퀴로 낚아 뱃머리에 올리게 하니, 준사가 날뛰면서 ‘이 자가 마다시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바로 시체를 토막내게 하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아군의 여러 배들은 적이 침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일시에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나아가 각기 지자, 현자총통을 발사하니 소리가 산천을 진동하였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 적선 31척을 격파하자 적선들은 후퇴하여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했다. 우리 수군이 싸움하던 바다에 정박하기를 원했지만 물살이 매우 험하고 바람도 역풍으로 불며 형세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당사도로 옮겨 정박하고 밤을 지냈다. 이번 일은 실로 천행(天幸)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주특기인 탐망 정보전은 이렇게 해전의 결과를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고성능 레이더 다루는 군인 자세가 중요, 풍전등화의 외교안보 위태!

현대전에서 아무리 뛰어난 고성능 레이다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을 운영하는 자는 바로 사람이다. 그 병사의 숙달된 훈련도는 기본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 적군을 반드시 물리쳐서 꼭 이기고야 말겠다는 필사즉생의 자세일 것이다. 요즘 적의 배가 우리 영해를 유유히 떠다니고 이중 삼중 경계망은 허물어지고 그 책임을 “네 탓이니” “누구 탓이니” 하며 폭탄 돌리기 하는 대한민국의 안보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다. 조선 창업 이후 200년 동안 이렇다 할 전쟁이 없었다. 무인들도 평화무드에 젖어 군기가 쏙 빠졌었다. 오늘날에 당시의 기시감이 급하게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임진-정유재란 7년 전쟁을 지휘한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피눈물을 흘리면서 망전필위(忘戰必危)!를 외치고 또 외쳤다. 즉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롭다”. 오늘날처럼 외교 안보의 사령탑이 인형처럼 눈동자를 돌리며 입력된 말만 되뇌이는 것을 보니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오호 통재라!<6회 연재 끝>

 

                                           <김동철 박사 약력>

▲교육학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이순신리더십 국제센터 운영자문위원장

▲성결대 교양학부 객원교수

▲전 중앙일보 기자-월간중앙 기획위원

▲경복고-한국외국어대학교-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명지대 대학원 졸

▲저서: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우리가 꼭 한번 만나야 하는 이순신(이순신 리더십 특강)’ ‘이순신 유적 답사기1’

▲논문: ‘이순신의 청렴 인성 리더십’ ‘나라사랑 충, 부모사랑 효, 백성사랑 애민, 부하사랑 소통, 거북선 창제의 창의력’ ‘충무공 이순신 시조에 나타난 인성’ ‘이순신과 원균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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