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글쓰기’ 신문은 ‘엄민용 기자의 우리 말글 산책’을 주 1회 연재합니다. 경향신문의 엄민용 기자(부국장)는 정확한 우리 말글 사용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전문가입니다. 대학과 기업체, 관공서 등에서 글쓰기 바로쓰기 특강 강사로 명성을 얻고 있습니다.

‘채소(菜蔬)’는 나물을 뜻하는 ‘채(菜)’와 ‘소(蔬)’가 결합한 한자어이고, ‘야채(野菜)’는 들을 뜻하는 ‘야(野)’와 나물을 뜻하는 ‘채’가 합쳐진 말입니다. 그 말이 그 말이죠.

그런데 ‘채소’는 우리의 한자말이고 ‘야채’는 일본식 한자말이니, ‘야채’를 버리고 ‘채소’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일제의 그늘에서 벗어난 8월이면 이곳저곳에서 그런 주장들이 유난히 많이 쏟아집니다.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 주장입니다. 예부터 중국에서는 ‘소채’나 ‘채소’라는 말을 사용했고,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채소’로 써 왔습니다. 이와 달리 일본에서는 ‘야채(야사이·やさい)’가 쓰였지요. 그 말이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로 건너와 널리 퍼졌습니다. 그러니 ‘야채’를 버리고 ‘채소’로 써야 한다는 얘기는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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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본에서 만들어진 말’이므로 우리가 써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국어’, ‘수학’, ‘과학’, ‘물리’, ‘화학’ 같은 말도 버려야 한다는 얘기가 되고 맙니다. 이들 말도 중국이나 우리나라가 먼저 쓴 것이 아니고, 일본이 먼저 사용한 말이니까요.

특히 우리말과 관련해 ‘일본 한자말은 버리고, 중국 한자말을 써야 한다’는 논리가 퍼져 있는데, 이는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대주의로 비쳐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국립국어원은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채소’를 ‘밭에서 기르는 농작물’로 뜻풀이하고 ‘야채’는 이러한 채소를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로 뜻풀이해 양자를 모두 표준어로 인정하고 있으므로 둘 다 쓸 수 있는 말입니다”라며, 두 말을 표준어로 보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온라인 가나다’에서도 “‘야채’와 ‘채소’에 대해 ‘야채’가 ‘채소’의 일본식 한자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기는 하지만, 그 근거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라고 밝히기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야채는 일본식 한자말이므로 쓰지 말고, 채소로 써야 한다”는 주장은 개인의 사견일 뿐입니다.

우리말 중에는 일본에서 건너 왔지만 어쩔 수 없이 쓰는 말이 많습니다. ‘가마니’와 ‘구두’도 그런 말입니다.

“곡식이나 소금 따위를 담기 위해 짚을 돗자리 치듯이 쳐서 만든 용기”를 뜻하는 ‘가마니’는 1908년에 일본에서 가마니틀이 들어오면서 비롯된 말입니다. 일본말 ‘가마스(かます)’에서 유래된 것이죠. 가마니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나라에서는 ‘섬’을 썼습니다. “가죽을 재료로 해 만든 서양식 신”을 일컫는 ‘구두’ 역시 일본말 ‘구쓰(くつ)’에서 온 것입니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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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만들어진 말이라고 해서 무조건 쓰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쓰지 말아야 할 것은 기스(→ 상처, 흠) 다대기(→ 다진양념) 단도리(→ 뒷단속, 채비) 쿠사리(→ 야단, 꾸중) 따위처럼 우리말로 충분히 쓸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않고 일본식 그대로 소리 내는 말입니다.

18번곡(→ 애창곡) 기라성 같은(→ 내로라하는) 정종(→ 청주) 등처럼 우리로서는 아무 뜻이 없고 일본의 풍습과 사상을 담고 있는 말도 쓰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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