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글쓰기’ 신문은 ‘엄민용 기자의 우리 말글 산책’을 주 1회 연재합니다. 경향신문의 엄민용 기자(부국장)는 정확한 우리 말글 사용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전문가입니다. 대학과 기업체, 관공서 등에서 글쓰기 바로쓰기 특강 강사로 명성을 얻고 있습니다.

 

지난 2007년 8월 1일부터 우리말의 큰 흐름 하나가 바뀌었습니다. 말 많고 탈 많던, 성씨의 두음법칙 적용 여부가 뒤집어진 것입니다.

이전에는 성이 柳인 사람은 한글 표기로 ‘유’만 쓸 수 있었는데, 이날부터 자기가 원하면 ‘류’로도 쓸 수 있게 된 것이지요.

李, 林, 梁 羅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나 ‘리’, ‘임’이나 ‘림’, ‘양’이나 ‘량’, ‘나’나 ‘라’로 쓸 수 있습니다.

지난 2004년 대법원은 “호적에 한자로 된 성(姓)을 한글로 기재할 때에는 한글맞춤법에 의해 표기하도록 호적 예규에 규정돼 있다”며 “버들 류(柳)씨나 오얏 리(李)씨, 그리고 그물 라(羅)씨 등을 호적부에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두음법칙에 따라 ‘유, 이, 나’로 각각 표기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2007년 대법원은 다시 “기존에 쓰던 성씨에까지 두음법칙을 강요하는 것은 기존에 사용하던 헌법상 인격권과 자기결정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며 두음법칙 적용을 명시한 호적 예규를 위헌으로 판결했습니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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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성은 혈연집단을 상징하는 기호이자 개인의 동질성을 나타내는 고유명사이므로 국가가 표기법을 강제하는 것은 인격권 침해라는 게 당시 대법원의 판단이었죠. 이에 따라 국어심의회도 지난 2009년 한글맞춤법의 두음법칙 자체에는 손을 대지 않는 대신 ‘성씨도 두음법칙을 따라야 한다’는 해설서 부분을 삭제했습니다. 따라서 柳, 李, 林, 梁, 羅씨 등은 자신이 원할 경우 류, 리, 림, 량, 라씨로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3월 하면 떠오르는 ‘유관순 열사’는 ‘류관순’으로 적을 수 없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도 ‘리승만’으로 적을 수 없고요. 성씨의 한글 표기를 바꾸려면 아버지 또는 개인이 반드시 가정법원에 변경신청을 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역사 속의 인물은 지금까지 써오던 대로 써야지, 지금의 규칙대로 후손들이 바꿀 경우 되레 큰 혼란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어느 집안에서는 ‘리순신 장군’으로 부르고, 다른 집안에서는 ‘이순신 장군’으로 부르면 아주 우스운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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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그런데요. 제가 방금 유관순 누나(?)에게 ‘열사’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러나 다들 안중근 의사에게는 ‘열사’ 대신 ‘의사’를 씁니다. 그 이유를 아십니까? 늘 써 오는 말이지만, 정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합니다. 제가 주변 기자들에게 물어봐도 제대로 의미를 구분하는 사람이 없더군요.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일제가 우리 국권을 침탈한 무렵부터 광복 때까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숨진 분들을 ‘순국선열’이라 부르고, 독립운동가 중 광복 후까지 생존한 분들을 ‘애국지사’로 부릅니다. 그리고 순국선열 중 ‘의사’는 “주로 무력으로 싸우다 죽은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하며, ‘열사’는 “주로 맨몸으로 싸우다 죽은 사람을 가리킬 때” 씁니다. 그래서 안중근·윤봉길 의사이고, 유관순·이준 열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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