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범구 주독일 대한민국 대사의 '대사관 이야기'(13)]

[편집자 주] ‘글쓰기’ 신문은 주독일대한민국대사관 정범구 대사의 ‘대사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정 대사는 대사관 주변 이야기와 한독 관계 등을 사회관계망서비스 ‘페이스북’에 올리고 있습니다. 정확하고 간결하고 논리적인 문장으로, 외교관의 소소한 일상과 깊이 있는 사색, 강대국들과의 이해관계를 담고 있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글쓰기’의 모범사례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특히 다양한 현장 사진을 곁들여 국민들에게 외교관이 일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범구 대사는 충북 음성 출신으로 16대, 18대 국회의원을 거쳐 지난해 1월 독일 대사로 부임했습니다.

서울 지하철에서 만나면 그냥 이웃인지 알 얼굴들.(사진=정범구 대사)
서울 지하철에서 만나면 그냥 이웃인지 알 얼굴들.(사진=정범구 대사)                                                                           

* 성과없이 끝난 하노이 회담 소식에 종일 마음이 무거웠다. 이것저것 관련 정보도 수집하고, 독일 정부, 언론의 동향도 체크해 보지만 무거운 기분은 어쩔 수 없다. 저녁에 몇 개 나라 대사들을 초청했는데 그닥 흔쾌한 기분은 아니다. 그래도 오래전에 내 쪽에서 잡았던 약속이라 일단 표정을 영업 모드로 바꾼다.

* 오늘(2019년 3월 22일) 초대한 손님들은 몽골, 카자크스탄, 키르기스탄 대사 부부다. 카자크스탄이나 키르기스탄이나 다 옛날 몽골족의 후예들이다. 인종학적으로 우리도 몽골족에 속한다. 또 어계로 분류하면 카자크스탄이나 키르기스탄, 몽골, 그리고 우리 모두 알타이 어계에 속한다.

* 식사 시작 전에 몽골 대사가 먼저 "위하여!"를 외치며 분위기를 잡는다. 몇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더니 좋은 걸 배워왔다. 몽골 대사가 가져온 40도 짜리 몽골 보드카 '징기스칸'과 53도 짜리 한국 소주 '화요'가 일합을 겨룬다. 한국 소주의 승리다. 중립지대에 있는 키르기스 대사와 카자크스탄 대사가 두 술을 다 마셔보더니 '화요'를 계속 마시자고 한다.

* 카자크스탄은 한국 현대사에서 지나칠 수 없는 지역이다.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영웅이었던 홍범도 장군이 생을 마친 곳이 카자크스탄의 끄질오르다란 곳이다. 1937년 스탈린이 연해주 거주 한인들을 중앙 아시아로 강제이주 시킬 때 그도 함께 휩쓸려 갔다가 1943년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박헌영의 첫 부인 주세죽이 10년 가까운 유형생활을 했던 곳도 끄질오르다의 한 협동농장이었다. 지금도 카자크스탄에는 10만여 명의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갑자기 끌려 오느라 변변한 가재도구도 못 챙기고 생판 낯선 허허벌판에 내팽겨쳐 졌던 선조들의 고난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때 카자크인 이웃들이 베풀어줬던 도움을 잊지 못한다. 오늘도 카자크스탄 '고려극장'에서는 우리 말 연극이 공연되고 우리 말로 '고려신문'이 나온다.

카자크, 몽골대사.(사진=정범구 대사)
카자크, 몽골대사.(사진=정범구 대사)                                    

* 메인메뉴로 비빔밥이 준비돼 있다고 하니 카자크스탄 대사 부인이 너무 좋아한다. 그녀의 비빔밥, 김치 발음은 아주 정확하다. 코스에 나온 만두를 보더니 만티, 만티 한다. 카자크어로 만두를 만티라고 한단다. 그러자 각자 서로의 닮은 말들을 앞다투어 내놓는다. 몽골어로 ''''이고, 마시는 ''는 몽골이나 카자크, 키르기스 모두 ''. 새삼 우리가 여러가지로 서로 얽혀 있다는 걸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것일 것이다. 우리는 소주를 계속 홀짝거리면서 샤만(무당)의 굿에 대해서, '텡그리'가 우리 '당골네'와 뭔 연관이 있는지 등등 아무 얘기나 편하게 해댔다.

* 속한 나라는 다 다르지만 입 다물고 서울 지하철 속에 같이들 앉아 있으면 별로 눈에 두드러지지 않을 외모들이다. 그래서인지 더 정이 가고 맘이 편하다. 확실히 서양인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편안함이 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헤어질 때 키르기스 대사가 위로를 건넨다. 트럼프와 김정은 회담이 잘 안됐지만 어찌보면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일 것이라고...

그러고 보니 오늘 식사 내내 아무도 이 얘기를 안 꺼냈다. 오늘의 가장 핫한 이슈였는데도...

새삼 속 깊은 알타이 족이 좋아졌다.(2019년 3월 22일)

가운데가 키르기스 대사.(사진=정범구 대사)
가운데가 키르기스 대사.(사진=정범구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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