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정 독일모델연구소 대표]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한 장의 사진"

오스트리아에서 근무할 때 일이다. 나는 주말에 가끔 빈 Wien 근교의 슈네베르크 Schneeberg 산 일대로 등산을 다녔다. 겨울에는 부활절이 되도록 스키도 탔다. 슈네베르크 산은 수도 빈으로부터 70~80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빈 시민의 수돗물이 여기서 공급된다. 빈의 수돗물은 많은 시민들이 그냥 마실 정도로 청량감이 좋고 질적으로도 세계 정상급이다. 바로 해발 2076m 고지인 슈네베르크의 눈 녹은 물이다.

이 산으로 가는 길 초입에 글로크니츠 Gloggnitz란 도시가 있는데, 이곳은 오스트리아의 건설장인으로 추앙받는 카를 레너 Karl Renner가 2차 대전 중 칩거하던 곳으로 그의 기념관이 있다. 2013년 글로크니츠의 레너 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한 장의 사진이 있었다. 바로 피점령국의 한 정치 지도자에 불과했던 레너가 미, 소, 영, 불의 서슬 퍼런 점령국 군사령관들을 좌우로 놓고 중앙에 앉아 찍은 사진이었다. 그의 정치력을 추측해 볼 수 있는 사료라 하겠다. 그는 오스트리아 국민들에게 “영도자”가 아닌 영원한 “교사” 그리고 전쟁 후 오스트리아의 “건설장인 Baumeister”으로 기억되고 있다.

카를 레너는 1918년 오스트리아가 1차 대전에서 패한 후 임시정부 수반을 맡아 베르사유에서 진행된 평화협정 교섭 대표로 오스트리아와 연합국 간의 강화조약인 쌩-제르맹 조약을 체결하고 전후 오스트리아의 첫 공화국 총리를 지냈다. 그리고 1945년 2차대전 종전 시에는 오스트리아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4.27. 나치 독일로부터 분리와 독립을 선언하였고, 스탈린과 직접 서신 연락을 취하며 소련이 4대 점령국 중 가장 먼저 오스트리아 임시정부를 승인토록 막후교섭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는 1945.10.20. 4대 연합국 모두로부터 승인을 받아내고 레너는 12.20. 전후 오스트리아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사진=1945.10. 20. 카를 레너와 4대 전승국 군사령관들(좌로 부터 미, 소, 레너, 영, 불 사령관) [사진 출처, 글로크니츠 레너 기념관]
사진=1945.10. 20. 카를 레너와 4대 전승국 군사령관들(좌로 부터 미, 소, 레너, 영, 불 사령관) [사진 출처, 글로크니츠 레너 기념관]

연합국의 임시정부 승인은 1943년 미, 영, 소가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을 원천 무효라고 선언한 모스크바 선언을 재확인해줌으로써 오스트리아는 나치 독일과 같은 침략자가 아니라 오히려 나치 독일의 희생자라는 논리를 관철시켰다. 이것은 훗날 오스트리아가 1955년 4대 연합국들과의 ‘국가조약 Staatsvertrag’ 체결로 독일과 같은 분단을 겪지 않고 완전한 주권을 회복하는 기반이 된다. 이렇듯 레너는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의 초대 총리와 초대 대통령을 맡아 격동기의 현대 오스트리아를 이끌었다.

나는 빈의 고서점에서 1950. 12월 레너의 타계 2주 전 그의 80회 생일을 맞아 발간되었던 연설문집을 구할 수 있었다.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Fuer Recht und Frieden' 란 이 연설문집은 당시 피글총리 Leopold Figl의 명의로 발간되었는데 피글은 그 서문에서 "오스트리아 국민은 한 세대 내에서 2번이나 부서진 폐허로부터 국가를 재건해야 하는 과제를 안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지치지 않는 건설장인 레너가 그 2번의 소임을 다하여 오스트리아의 정의와 평화의 반석을 만들었다"고 서술했다. 내가 만났던 레너 전문가인 나스코 Siegfried Nasco 박사에 따르면 그는 처칠이나 레닌처럼 많은 저술을 하여 거의 100권에 달하는 저서를 남겼다 한다.

오스트리아 군사 박물관장을 지낸 라우헌슈타인 Manfred Rauchenstein 교수의 이야기다.

레너는 1945. 4월 2차 대전 막바지에 빈 근교의 글로크니츠에 칩거하고 있었는데, 여기로 소련군 103 보병연대가 진군해 왔다. 레너는 부대장을 면담하여 전후 질서 확립에 동참하겠다며 오스트리아 사민당의 재건을 지원해 달라 하였고 스탈린에게 보내는 3개 국어로 된 친서를 전달하였다. 그 후 레너의 친서는 3번에 걸쳐 보내졌는데 2번째 친서에서 스탈린의 승리를 축하하고 그를 위대한 영웅으로 칭송하여 다소간의 논란거리를 야기하기도 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스탈린은 전쟁 전 이미 저명한 사회당 정치인이었던 레너를 이미 알고 있었고 전후 오스트리아에서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레너를 찾고 있었다고 한다. 여하튼 이 친서는 소련이 오스트리아 임시정부 수립에 협조적으로 돌아서게 했다. [2014.1.10.]

레너는 1938. 3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자 이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내고 글로크니츠로 와서 칩거 중이었다. 하지만 종전이 다가오자 소련과 협의하에 임시정부를 출범시키는 기민함을 보여주었고, 오스트리아는 레너의 출중한 정치력으로 사실상 독일과 함께 전쟁 책임이 있었지만 전후 분단되지 않고 영토를 보전할 수 있었다.

레너가 그랬듯이 많은 오스트리아인들은 1938년 나치 독일과의 병합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내가 만난 오스트리아의 한 정치학 교수는 당시 대부분의 오스트리아인들이 행복해 했다 “most Austrians were happy”라고 언급했다. 실제로 전쟁에 나가 전사한 오스트리아 군인들이 26만 명이나 되었고 오스트리아 유대인 20만 명 중 6만 5천 명이 살해되었다. 그럼에도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함께 싸운 2차 대전"에서 패배했다는 것을 인정치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이 나치 독일에 강제 합병 당한 첫 희생자로서 어쩔 수 없이 2차 대전에 참전했지만 나치의 패배로 해방되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마치 일본이 2차대전을 일으켰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을 맞아 자신들이 전쟁의 피해자라는 '피해자 코스프레'와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싶다.

사진=1952. 12월 경무대를 방문한 아이젠하워 미 34대 대통령 당선자가 이승만 대통령과 환담하고 있다. 왼쪽부터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 이승만, 아이젠 하워, 그의 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출처, NewDaily 게재 자료 사진)
사진=1952. 12월 경무대를 방문한 아이젠하워 미 34대 대통령 당선자가 이승만 대통령과 환담하고 있다. 왼쪽부터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 이승만, 아이젠 하워, 그의 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출처, NewDaily 게재 자료 사진)

일각에서는 이것을 두고 오스트리아의 '국민적 거짓말 national lie'이라 한다.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강제병합에 대항하여 목숨 바쳐 싸운 오스트리아인들이 분명히 있다. 내가 아는 오스트리아 외교부의 인트야인 Teresa Indjein 대사의 집안도 그런 독립투사의 집안이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오스트리아인들이 히틀러의 합병을 열렬하게 지지했고 기꺼이 전쟁에도 참여했다. 그렇기에 오스트리아의 '국민적 거짓말'이란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이 국민적 거짓말은 바로 오스트리아의 능숙한 외교로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멸망 후 세워진 제1공화국의 계승자로서, 1938년 이후 2차 대전 종전 시까지 잠시 존재했던 오스트리아는 '콤마 coma 상태'의 국가였기 때문에 현재의 오스트리아 제2공화국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점을 수미일관 주장한다. 당시 나치의 범죄 행위에 대한 국가 배상 의무가 없다며, 오히려 나치 침략의 희생자로서 독일로부터 보상을 받아내어 그 일부를 희생 유대인들의 지원에 사용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사람인 히틀러를 독일 사람으로 만들고 독일 사람인 베토벤을 오스트리아 사람으로 만든 것이 전후 오스트리아 외교의 최대 성과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하지만 실제로 오스트리아는 외교에 능한 국가다. 1차 세계대전 패배로 광대한 영토를 상실하는 등의 아픔을 겪었지만 2차대전 후에는 영토의 상실 없이 국토를 보전하였고 국제연합 전문기구들을 유치하여 빈은 뉴욕, 제네바에 이은 제3의 유엔 도시가 되었다. 1955년 ‘국가조약’으로 완전한 주권을 회복하면서 영구 중립국임을 선언하였으나 NATO에만 가입치 않았을 뿐 유럽연합 EU의 일원으로서 유럽 화폐동맹 EMU에도 가입하여 사실상 서방세계의 일원으로서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 우리 외교의 롤모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상기 레너와 4대국 점령군 사령관들의 사진과 비슷한 구도의 우리나라 사진을 골라봤다. "6.25. 전쟁 시 미군 장성들이 이승만을 존경한 이유" 제하의 New Daily 기사에서다. 오스트리아의 제2공화국 건국은 사회주의자인 카를 레너가 주도했지만 대한민국의 건국은 반공주의자 이승만이 주도했다.

오스트리아의 중립화 모델을 한반도에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는, 남쪽의 귤이 북쪽에 가서는 탱자가 된다는 ‘귤화위지’라는 말대로 우리나라에서는 적용 가능한 모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 외교관이 만난 독일모델]에서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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