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근 '붓다로 살자' 편집장 / 전 조선일보 기자(노조위원장)]

‘파우스트’ 메피스토펠레스의 말을 봉준호가 우리에게 하고 있다
“하하하, 절망이 모자라. 좀 더 깊이 절망하시오.”

김왕근 전 조선일보 노조위원장.
김왕근 전 조선일보 노조위원장.

영화는 둘로 나뉜다. 하나는 ‘성찰’ 영화이고 하나는 ‘오락’ 영화이다. 성찰 영화란 “우리를 바로 보게 하는”영화이고 오락영화란 ‘가공(架空)’의 재미를 추구하는 영화이다. 예컨대 ‘해리 포터’ 시리즈나 혹은 '007' 같은 영화는 현실에 있는 이야기가 아니어서 가공의 재미를 추구하는 영화, 오락 영화이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7월 4일생' 같은 영화는 성찰 영화다. “미국이 치른 월남전은 이런 것이었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역할을 이 영화가 했다. 이건 미국민들에게 자기네들을 바로 보게 한 영화이고, 우리도 그걸 곁에서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물론, 모든 영화가 다 현실을 반영하며 동시에 오락을 추구한다. 영화 ‘터미네이터’는 오락영화지만, 컴퓨터나 인공지능의 발전이 가져올 미래를 성찰하게 해 주므로 성찰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기생충’은 성찰 영화 쪽으로 더 기운다. 한마디로, 이 영화에서 영화적 재미를 과도하게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오락영화의 특징은 기존의 우리의 관념에 기댄다는 것이다. 우리는 선과 악으로 세상을 구분해서 바라본다. 대부분의 ‘영웅’을 다루는 영화는 이런 이분법의 시각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선이 악을 이기기를 바라고, 영화의 결말이 여기에 부합하면 통쾌한 느낌을 갖는다.

성찰 영화의 특징은 기존의 우리 관념을 깬다는 것이다. 예컨대 한강이 쓴 소설 ‘채식주의자’는 스토리에서 나오는 긴박감 같은 것은 별로 없다. 다만 우리의 문명이 얼마나 육식으로 표현되는 ‘야만’에 기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소설의 이런 ‘천착’이 작가 한강에게 맨부커상을 수여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기생충’이 칸 영화제 작품상을 받은 것도, 이 영화가 우리에게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기생충' 포스터.
영화 '기생충' 포스터.

기생충은 우리에게 불편하게 다가온다. 왜냐 하면 선악의 이분법에 기반한 생각의 틀에 균열을 만들기 때문이다. 관객은 기생충에 나오는 주인공 가족에 감정이입을 하며 영화를 본다. 그런데 그 주인공들이 부도덕하다. ‘아버지’가 또 다른 ‘기생충’을, 자신들에 의해서 그 성곽 같은 집에서 떨려나간 사람들을 염려하는 말을 하자 딸은 “씨팔, 나한테 좀 집중해 줘”라고 말한다. 자신의 현실이 너무 힘드니 다른 사람을 신경 쓰는 일은 사치라는 뜻이리라. 그러나 그 ‘다른 기생충’도 주인공 가족 못지않게 절박하다. 이런 상황은 관객이 주인공에게 과몰입하는 것을 경계하게 한다. ‘기생충’은 ‘몰입’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몰입하면서도 성찰하게 한다.

주인공 가족들이 한 일은 전체가 다 ‘사기’다. 그러면서 자기가 하는 일이 무슨 일인지 그 의미를 모른다. 그들에게 그 일의 의미라 하면, 다만 ‘생존’이다. 생존은 가장 절박한 일일 수 있기 때문에 이 가족들을 비난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전적으로 공감하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생존’보다 더 중요한 무엇이 있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어정쩡한 상황에서 관객은 그래도 비극으로 가지 말았으면, 하고 바란다. 관객이 감정이입하는 것은 아무래도 주인공 가족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불길한 예감은 적중하고 만다. 그 과정을 따라가는 일은 고통이고 공포다.

'기생충' 출연진.(사진='기생충' 누리집)
'기생충' 출연진.(사진='기생충' 누리집)

주인공들이 부도덕하지만, 그러나 감독은 관객들로 하여금 그들을 비난할 수도 없게 만든다. 그들의 처지를 그렇게 만든 것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다만 지금의 상황이 비극적임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감독은 부자들을 비난하고 있다. 저택의 주인(이선균)이 하는 “김기사는 선을 넘지 않아서 좋아”라는 말은 이웃을 이웃이 아니라 하나의 도구, 하나의 소모품, 언제든 다른 누구와 대체할 수 있는 부품으로 생각함을 보여준다. 이선균은 죽은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에 코를 막으면서, 죽어가는 그 사람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의 비극은, ‘사람’에 대한 관심이나 예의가 없는 그의 태도 때문이다. ‘사모님’이 사람을 너무 잘 믿고 잘 속는다는 것도, 그녀가 그녀의 ‘이웃’, 즉 ‘기생충’에 관심이 없음을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영화는 결국 비극으로 끝난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오는 결말도 ‘가짜 희망’일 뿐이다. “돈을 벌겠다”라고 하는 아들의 결심은, 결국은 “칼에 찔려 죽은 그 남자의 자리에 내가 가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리를 바꾸는 것이 곧 정의는 아니다. 함석헌 옹은 “혁명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혁명가가 혁명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갈파했었다.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가 하는 말을 봉준호가 우리에게 하고 있다. “하하하, 절망이 모자라. 좀 더 깊이 절망하시오.”

저작권자 © 자연치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