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ROTC 공화국이다
목숨을 건 율곡 이이의 부패 일소 직간(直諫)
"나에게 뇌물은 물거품과 바람 앞 등잔일 뿐이다"
청렴장군 이순신의 선공후사 사례

대한민국은 'ROTC 공화국', 'Republic of Total corruption', ‘총체적으로 썩은 나라’ 

우리나라 일부 관리들, 특히 고위 공직자의 부정부패는 고질병이다. 나라꼴이 오죽했으면 대법원 판사 출신인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이 2016년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을 제안했을까? 동기는 이렇다. 2010년 스폰서 검사 사건, 2011년 벤츠 여검사 사건과 관련, 법원은 향응과 금품수수에서 대가성과 직무관련성이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 정의가 살아있는 곳인가? 서민을 울리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판결은 여전하다. 어려운 법 공부해서 사회 정의는 무시한 채 자신의 배만 채우려는‘법꾸라지’들이 득세하는 한, 대한민국은 미래가 없다. 나는 우리 조국을 ‘ROTC 공화국’이라고 부른다. ROTC? 'Republic of Total corruption', ‘총체적으로 썩은 나라’를 뜻한다.

공무원 사회에는 어디에 얼마나 썼는지 영수증을 제출하지 않아도 되는‘깜깜이 예산’이 있다. 이른바 특수활동비다. 그 내역을 여기서 일일이 밝히지는 않지만 국회, 국정원, 국방부, 검찰, 경찰 등 힘 있는 권력기관들과 연관되어 있다. 국민의 피와 같은 세금인 특수활동비를 가지고 자기들끼리 주고 받거나 또는 개인 호주머니로 들어가 쌈짓돈으로 쓰여진다.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이 하루 벌이로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피가 거꾸로 솟는 일임에 분명하다. 대한민국에서 정의로운 황금박쥐가 사라진 지 꽤 오래됐다. 그래서 요즘 새로운 법률안이 나왔는데, 고위공직자비리를 수사하는 법(공수처법)을 놓고 여야간에 뜨거운 쟁점이 불붙었다. 공수처장을 대통령이 임명하니, 불편부당한 처사를 바랄 수 없다는 게 야당의 논리다. 또 검찰이 가지고 있는 수사, 기소, 공소유지 권한을 가진 새로운 공룡 수사기관이 생기니 대통령이 두 개의 칼을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남용할 소지가 크다는 것이다.

인간의 속성은 이익을 탐하고 해로움을 피하려는 호리오해(好利惡害) 존재다. 즉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수만년 전에 나타난 호모사피엔스 인류는 이기적 DNA를 잘 활용하면서 진화되어 오늘날까지 생존해 왔다. 그래서 이기적이란 말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적자생존의 법칙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이기심이 도를 넘어 ‘내 것은 당근 내 껏, 네 껏도 내 껏’이라는 탐욕이 작용하면서 비극으로 변질됐다.

이른바 마태복음 효과(Matthew effect)라는 말과 상통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K. 머턴은 마태복음 25장 29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말을 인용, 부익부 빈익빈을 설명했다. 독일의 막스 베버는 일찌기 천민자본주의(PariaKapitalismus)를 설파했다. 즉, 인간이 물질이나 이기심에만 집착하여 공정한 자유경쟁, 개인의 창의성 발휘, 경제적 혁신, 일에 대한 헌신적인 직업윤리를 상실해 버린 타락된 자본주의를 일컫는다.

이 대목에서 역사적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400여 년 전 임진-정유재란 때나 100여년 구한말 고종 때나 지금이나 왕족과 양반네들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정쟁과 환국으로 상대를 타격하는 이기적인 작태를 보여 결국 나라를 망조 들게 만들었다. 분별심을 잃어 이기심이 넘쳐나면 성악설의 순자가 말한 대로, 엄정한 법에 의해 신상필벌로 다스리는 수밖에 없다.

호리오해한 인간의 이기적인 속성은 공평한 룰에 의한 경쟁이 보장될 때 비로소 자신과 집단의 발전을 이끄는 에너지원(源)이 되기도 한다. 자유시장경제에서 생존경쟁 시스템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공평을 보장해주는 페어게임의 잣대가 중요할 터인데, 그마저도 유명무실해졌음으로 각설한다.

공자는 고민하다가, 인간의 속성에서 겨우 눈꼽만큼 있는 양심에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그게 바로 견리사의(見利思義) 또는 견득사의(見得思義)라는 말이다. 즉 “눈앞에 이득이 보일 때 먼저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옛날 옛적 고리타분한 소리로 무시되기 일쑤였다. 이 말이 제대로 지켜졌다면 지금 교도소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들어차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특히 공직자가 최우선적으로 지켜야 하는 처신의 본은 선공후사(先公後私)다. 나라의 녹을 먹는 이상, 공적인 일을 먼저 생각하고 사적인 것은 뒤로 미룰 줄 아는 멸사봉공의 자세를 금과옥조처럼 외우고 체화시켜야 한다. 이 네 글자에 담긴 뜻만 제대로 지켜도 공무원은 60세 정년과 그 후 사망할 때까지 풍족한(?) 연금으로 따뜻한 노후를 보장받는다. 그런데 더 갖고 싶은 욕심! 그것을 다스리지 못함으로써 쌓아놓은 공든 탑을 발로 차버리고 마는 우를 범한 사례는 수두룩하다.

병법가였던 주나라 강태공(姜太公)은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의승욕즉창 욕승의즉망(義勝欲則昌 欲勝義則亡)’, 즉 “의리가 욕심을 이기면 번창하고 욕심이 의리에 앞서면 망한다”고 했다.

또 전국시대 병법가 위료자(尉繚子)도 ‘화재어호리 해재어친소인(禍在於好利, 害在於親小人)’이라 했다. 즉“화는 이익을 좋아하는데 있고 피해는 간사한 소인 모리배(謀利輩)를 가까이 하는데 있다”고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옛말 그른 것 하나도 없다.

1598년 무술년 10월 순천 예교성(曳橋城)에 주둔해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협공하기 위해서 명나라 유정(劉綎) 제독과 바다의 진린(陳璘) 도독은 수륙연합작전을 계획했다. 그런데 유정은 어쩐 일인지 약속을 어기고 작전실행에 미적거렸다. 고니시가 유정에게 뇌물로 금은보화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또 끝나가는 전쟁터에서 명나라 군사를 희생시킬 명분도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고니시는 진린에게도 값진 재화를 보내 탈출구를 열어달라고 애걸했다. 이때 고니시는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사망하자 철군하기 위해서 애가 타들어가는 상황이었다.

진린은 궁서물박(窮鼠勿迫), 즉 “쫓기는 쥐는 추적하지 않는 게 병법이다”면서 “퇴각하는 적장의 퇴로를 열어주면 어떻겠소.”라며 휘하 이순신 장군에게 물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편범불반(片帆不返), 즉 “단 한척의 왜군을 그대로 돌려보내지 않겠다”면서 진린에게 강력히 반발했다. 그러자 고니시는 이순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고기와 조총과 칼 등 뇌물을 보냈다.

"나에게 뇌물은 물거품과 바람 앞 등잔일 뿐이다"

“나는 임진년 이후 적을 수없이 죽이고 노획한 총과 칼을 산더미처럼 가지고 있다. 이것을 다 무엇 하겠느냐”고 하자 고니시가 보낸 사자(使者)는 머쓱해져서 돌아갔다. 선공후사의 초극(超克) 정신으로 무장된 강직한 장군은 뇌물을 포말풍등(泡沫風燈), 즉 물거품과 바람 앞의 등잔 같이 일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으로 여겼다.

진린은 “이미 적의 뇌물을 받았으니 (고니시를 놔주고) 남해의 적이나 토벌하러 가자”며 다시 이순신을 설득했다.

남해 관음포 이락사, 대성운해. 어느 여름날 답사 때.
남해 관음포 이락사, 대성운해. 어느 여름날 답사 때.

이에 이순신 장군은 “남해의 적은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이므로 눈앞의 적을 놔두고 우리 백성을 죽일 수는 없다”면서 “명나라 황제께서 장수를 명하여 보낸 것은 우리 소국의 인명을 구해주기 위한 것인데 어찌 남해의 우리 백성을 베어죽이겠다는 말인가. 그것은 황상(皇上)의 본의가 아닐 것이다”며 논리정연하게 진린에게 답했다. 진린은 대국의 장수로서 이순신의 명쾌한 논리에 그만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던지 11월 19일 조명연합함대를 동원, 노량해전에 참전하게 된다.

이순신 장군이 왜수군의 조총을 맞아 최후를 맞이한 바로 그 관음포 해전이다. 큰 별이 바다로 떨어진 대성운해(大星隕海)의 현장은 남해 관음포 이락사(李落祠) 앞바다이다. 필자는 수차례 관음포 유적지를 찾았다. 마음이 울적할 때나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그곳을 찾아 이순신 장군과 소통을 시도했다. 고즈넉한 소나무 숲속 길을 따라 사당에 도착하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가 걸려있다.

목숨을 건 율곡 이이의 부패 일소 직간(直諫)

일찍이 율곡 이이(李珥)가 선조에게 올린 만언봉사(萬言封事) 가운데 ‘기국비국(其國非國) 부부일심지대하(桴腐日深之大厦)’라는 말이 나온다. 곧 “이건 나라가 아닙니다. 나라가 나날이 썩어가는 큰 집의 대들보와 같습니다.”

이율곡의 견득사의. '이익을 보거든 그것이 옳은 지 먼저 생각하라.'
이율곡의 견득사의. '이익을 보거든 그것이 옳은 지 먼저 생각하라.'

만언봉사는 1574년(선조7년) 왕명의 출납을 맡는 우부승지였던 율곡이 선조에게 목숨을 걸고 올린 상소문이다.

재이(災異 하늘과 땅에서 일어나는 괴이한 재앙)가 발생하여 당황한 선조가 제언을 구하는 교지를 내렸고, 이에 율곡은 난국을 타개하는 상소를 올리게 된다. 이 글에서 율곡은 조선 조정과 사회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목숨을 내걸고 왕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기묘사화와 을사사화 때 이루어진 나쁜 습성과 규칙을 개혁해야 한다’면서 당대 정치가 실질적인 공(功)을 얻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특히 상하(上下)의 신뢰, 관리들의 책임 소재와 책임감, 경연(經筵 임금과 신하가 국정을 논하는 일)의 운영, 인재 등용, 재해 대책, 백성의 복리 증진, 인심의 교화에 있어 실(實)이 없음을 밝혔다. 이어서 수신(修身)의 요체로 분발, 학문, 공정, 어진 선비를 가까이 함 등을 들었다. 또 안민(安民)의 요체로 개방적인 의견 수렴, 공안(貢案 세금)의 개혁, 사치풍조 개혁, 선상제도(選上制度 인재선발)의 개선, 군정(軍政) 개혁 등 조목을 현황과 개선책으로 논술했다.

그러나 역성혁명의 주역인 이성계(李成桂)의 조선 창업이후 200년 간 태평성대를 거치면서 쌓였던 적폐(積弊)는 쉽사리 고쳐지지 않았다. 숭무(崇武) 정신이 실종된 가운데 얼마 안 있어 미증유(未曾有)의 난리가 일어났으니 그게 바로 1592년 임진왜란이다.

매사 원리원칙을 강조했던 장군의 일생은 파란만장(波瀾萬丈), 우여곡절(迂餘曲折)의 연속이었다.‘관행’이란 명목으로 부패를 스스럼없이 저지르는 수많은 부패관료들로부터 시기와 모함을 받았다.

청렴 장군 이순신의 선공후사 사례

1579년 훈련원 봉사(종8품)로 있을 때 병조판서 김귀영(金貴榮)이 자기의 서녀(庶女)를 첩으로 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 갓 벼슬길에 올랐는데 어찌 권세가의 집을 드나들 수 있느냐”며 거절했다. 이 해 병조정랑(정5품)인 서익(徐益)이 자기와 친한 사람을 차례를 뛰어넘어 참군(參軍 정7품)으로 올리려 하자 이순신은 담당관으로서 허락하지 않았다. 병조정랑은 병조의 인사권 쥐고 있는 실력자였지만 이순신은 부당한 지시를 받지 않았다.

1580년 6월 이순신은 흥양(고흥)의 발포진 수군만호(종4품)로 임명되었다. 이 즈음 전라좌수사 성박(成鑮)이 발포 객사 뜰의 오동나무를 베다가 거문고를 만들겠다며 사람을 보냈다. “이것은 관가의 물건”이라며 직속상관의 부탁을 거절했다. 이 ‘괘씸죄’는 근무평점을 매기는 후임 수사에게 인계됐고 전라감사와 수사가 참석한 근무평정에서 하위인 폄(貶 나쁘게 말함)을 당할 처지에 있을 때 전라도사 조헌(趙憲 후일 의병장)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순신이 실력 면에서 최고의 지휘관인데 어찌 폄할 수 있으리오”하며 붓을 놓았다.

발포 오동나무 비석. '뜰의 오동나무도 나라의 것이다.'
발포 오동나무 비석. '뜰의 오동나무도 나라의 것이다.'

그 후 전라감사 손식은 이순신을 떠보려고 감영으로 불렀다. 진법에 관한 진서강독과 진도작성을 지시했을 때 이순신은 거침없이 답하고 유려하게 그려냈다. 그러자 손식은 이순신의 손을 잡으며 “내가 진작 그대를 바로 알지 못했던 것이 한이다”라며 그 후 이순신을 높게 평가했다.

1582년 1월 서익이 군기경차관(국방부 군기검열단장)으로 발포(고흥) 진영을 찾았다. 군적 허위기재! 군기보수불량! 이란 이유로 이순신을 파직시켰다. 이 무고(誣告)는 3년 전 이순신에게 인사청탁을 부탁했다가 거절당한 분풀이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와관련, 류성룡의 징비록을 옮겨본다.

“서익의 모함을 받아 이순신이 막 옥에 갇혔을 때 일이 어떻게 될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때 한 옥리가 이순신의 조카 이분에게 비밀히 말했다.‘뇌물을 쓰면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다’이순신이 이 말을 듣고 이분에게 노하여 말했다.‘죽으면 죽을 따름이지 어찌 바른 도리를 어기고 삶을 구하겠느냐?’”

이순신은 1582년 발포만호에서 파직되고 다시 훈련원에서 하급직으로 근무하게 됐다. 롤로코스터를 탄 것처럼 오르내림을 심하게 경험했던 이순신은 속으로 차오르는 울분을 삭이느라 활터를 자주 찾았다. 그때 정승 유전(柳琠 1531~1589)이“자네에게 좋은 전통(箭筒 화살통)이 있다는 말을 들었네. 나에게 줄 수 없겠는가?”라고 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자칫 뇌물이 될 수 있다”며 윗사람의 청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당시 서익의 무고로 파직당한 뒤 훈련원 말단으로 복직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기회가 있었지만 장군은 원칙을 고수했다.

사생유명 사당사의. '죽고 사는 게 하늘의 뜻인데 죽게 되면 죽는 것이다.'
사생유명 사당사의. '죽고 사는 게 하늘의 뜻인데 죽게 되면 죽는 것이다.'

어릴 적 한성 건천동(마른내 골)에서 함께 자랐던 류성룡이 이순신에게 다음과 같이 귀띔했다. “이조판서 율곡 이이(李珥)가 같은 성씨(덕수 이씨)인 자네를 한번 만나보길 원한다”는 것이었다. 이순신은 이마저도 거절했다.

“같은 성씨여서 만날 수는 있지만 공직의 인사권을 가진 전상(銓相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통칭하는 말)을 만날 수는 없다”는 게 이유였다. 오늘날의 우리네 상식(?)으로 보면 이상하고 바보 같은 처신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도 거절을 하다니?

수지청즉무어(水至淸卽無魚)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고

인지찰즉무도(人至察卽無徒) 사람이 너무 따지고 살피면 동지가 없느니라

22년 동안 공직자로서 장군의 삶은 이렇듯 원리원칙의 연속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벽창호(碧昌牛)처럼 고집이 세고 세상물정에 어두운‘깜깜이’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23전 23승! 무패 전승의 기록을 보더라도 그는 남다른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오늘날 선공후사 청렴 정신에서 투철한 공직자의 표상으로 떠올랐다. 극기복례(克己復禮)! 온갖 미혹에서 자신을 이기고, 길이 아니면 가지 않고 말이 아니면 듣지 않는, 인간본연에 다가가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옳은 일에 자기 한 몸을 선뜻 바쳐 죽을 수 있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을 이룰 수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전시 중에도 지방 관리들의 뇌물수수 등 부패는 끝이 없었다. 1594년 2월 16일자 난중일기다.

수령즉엄악포계(守令則俺惡褒啓) 수령들은 뇌물 받고 비리 덮어주고 포상받게 해주었다

기망천청지어차극(欺罔天廳至於此極) 국왕의 귀를 기망하니 이것이 극에 달했다

국사여시만무평정지리(國事如是萬無平定之理) 국사가 이러니 나라가 결코 평안할 수 없다

앙옥이이(仰屋而已) 나는 그냥 천장만 바라볼 뿐이다

오호 애재(哀哉)라! <3회 끝>

                                           <김동철 박사 약력>

▲교육학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이순신리더십 국제센터 운영자문위원장

▲성결대 교양학부 객원교수

▲전 중앙일보 기자-월간중앙 기획위원

▲경복고-한국외국어대학교-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명지대 대학원 졸

▲저서: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우리가 꼭 한번 만나야 하는 이순신(이순신 리더십 특강)’ ‘이순신 유적 답사기1’

▲논문: ‘이순신의 청렴 인성 리더십’ ‘나라사랑 충, 부모사랑 효, 백성사랑 애민, 부하사랑 소통, 거북선 창제의 창의력’ ‘충무공 이순신 시조에 나타난 인성’ ‘이순신과 원균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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