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나슬 시민기자] '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영화감상문 기고

장나슬 시민기자.
장나슬 시민기자.

며칠 전 엘리베이터를 한 남자와 함께 탄 적이 있다. 안경을 쓰고 깔끔한 정장 차림에 서류 가방을 든 모습이 대기업 신출내기 사원 같았다. 그가 엘리베이터에 들어설 때 갓 말린 옷을 입고 나온 듯한 상쾌한 냄새가 났다. 어여쁜 여성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탄 적도 있다. 진한 화장에 검정 원피스가 어울리는 여성이었다. 그런데 지나친 향수 냄새에 현기증이 났다.

우리는 항상 향기 속에 산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운동을 할 때도, 심지어 잘 때도 우리의 후각은 열심히 일을 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5가지 감각 중 후각은 우리가 코를 막지 않는 이상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 다양한 냄새를 맡게 된다. 산책을 가면 풀 냄새가 나고, 영화관에 가면 고소한 팝콘과 버터 오징어 구이 냄새가 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에겐 체취가 있기 때문에 냄새로 특정 기억을 유지할 때도 있다. 어린 아이들은 ‘엄마 냄새’, ‘아빠 냄새’가 난다고까지 말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위의 향기에 영향받고 있음이 틀림없다.

영화 '향수' 화면 캡처.
영화 '향수' 화면 캡처.

소설 <향수>의 저자 파트리크 쥔스킨트는 유명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수상을 거부하며 가난한 은둔자로 살았다. 그의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자기 세계에 갇혀 사는 ‘괴짜’로 나온다. 어쩌면 쥔스킨트 자신을 묘사했는지도 모른다. 소설 <향수>를 영화로 만든 톰 티크베어 감독의 <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도 예외는 아니다. 주인공 그르누이의 특출난 후각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는 게 아니라 그가 사람들에게 외면받는 이유가 된다.

작가는 ‘냄새’를 통해 존재감과 자아정체성을 표현하다. 각자의 냄새는 어느 누구도 대체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해 지문과 같이 한 사람의 유일한 존재를 증명해 준다는 부분을 깊이 파고 들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냄새가 있다. 하지만 그르누이는 자신만의 향기가 없었다. 이것은 그가 외면받은 또 다른 이유다. 아무에게도 사랑받는 법과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기에 그는 자신만의 냄새를 만들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 살인을 통해 아름다운 여자들의 냄새를 모아 ‘천사의 향수’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르누이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향수에 쌓여있는 그르누이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 그는 삶에 의욕을 잃고 자살을 한다.

영화 '향수' 포스터.
영화 '향수' 포스터.

냄새는 사람의 인상에 큰 영향을 준다. 냄새는 공기 흐름에 따라 희미하게 느껴진다. 그 희미한 냄새가 상대에게 원래 갖고 있던 인상을 바꿔주기도 한다. 서두에서 언급한 남자와 여자도 그렇다. 그 남자가 운동을 금방 마친 상태였다면 쾌쾌한 땀 냄새가 나서 호감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여자를 처음 봤을 때 들었던 ‘예쁘다’는 이미지는 진한 향수에 의해 ‘과하다’, ‘답답하다’로 바뀌고 말았다.

후각에 신비한 능력이 있는 주인공은 영화 초반에만 특별해 보였다. 그저 후각만으로 남들이 수 년 동안 실험해 만든 향수를 다시 제조하고 한번 맡은 향기를 오랫동안 기억해 버리니 말이다. 하지만 그르누이의 집착은 그가 저지른 살인의 두려움을 무마시켜 버린다. 한 여성의 체취에 이끌려 우발적으로 저지른 살인을 통해 그는 자신의 행동에 당황하기보다 그녀의 체취를 간직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찾는다. 냄새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그를 과연 특별한 일반인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사이코패스라 해도 무방한지 정확히 판가름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영화 속 죽음은 우연한 죽음과 직접적인 살인으로 나뉜다. 그르누이는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첫 울음 소리로 어머니를 사형장으로 보낸다. 그 뒤에도 그가 장소를 옮기게 될 때마다 이전에 그를 돌보았던 자들은 살인으로든 사고로든 죽게 된다. 이 죽음들은 영화 자체에서도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지만 또 다른 면에서 바라본다면 그르누이를 외면했던, 혹은 이용했던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향수' 화면 캡처.
영화 '향수' 화면 캡처.

그에 비해 그르누이가 죽인 여성들의 죽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 번째로 죽은 여인은 후에 그르누이가 사랑하던 여자로 밝혀진다.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채 향기에만 집착하던 그의 광기의 결과물이다. 그 후 천사의 향수를 제조하면서 희생되었던 여자들은 그가 하나하나씩 빼앗아 갔던 정체성이다. 이 여성들의 죽음은 주인공이 자신에게 부여하는 존재성을 만들기 위해 사용한 재료다. 그가 천사의 향수를 뿌렸을 때 그를 사랑하게 된 사람들은 그르누이를 사랑했다기보단 천사의 향수를 덮어쓴 그를 사랑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같은 사람으로서 자신만의 채취를 갖고자 했던 그의 목표를 어떤 면에선 달성하지 못했다고 본다. 예를 들면 학급에서 인기를 얻기 위해 매일 같이 반 아이들에게 과자를 주거나 숙제를 보여주는 행위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결국엔 아무 소용이 없지 않나 싶다.

이 영화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알쏭달쏭’이다. 영화를 보는 두 시간 동안 머릿속에선 의문이 더 많이 들었다. 어째서 그르누이가 살인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다른 사람을 사형 집행시켰는지, 왜 그르누이는 자신이 태어난 곳에 가서 자살을 한 것인지에 관한 의문은 아직도 희미한 추정만으로 남는다. 영화가 책에 비해 시간적 제약이 컸던 것 같다. 하지만 사람에게 향기란 큰 의미가 있다는 사실은 명확히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 향기를 갖지 못했던 그르누이는 존재감이 없기 때문에 남과 같은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그르누이가 사랑을 받고 자랐다면, 혹은 무취인 자신을 인정하고 자신을 사랑해 주었더라면 영화의 결말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장나슬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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