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정 독일모델연구소 대표]
갈등 만드는 일은 피하는 게 좋다
요즘 긴장관계에 있는 일본이라서 더욱 그렇다
해양 영토를 결정하는 기준은 물리적인 거리가 아니다
누가 더 해양 진취적인가에 달려 있다.
터키의 소아시아 반도에 가까운 섬들도 터키가 아닌 그리스 섬

장시정 대표의 대마도 여행 일행.
장시정 대표의 대마도 여행 일행.

[편집자 주] 장시정 독일모델연구소 대표의 대마도 기행문을 싣습니다. 대마도의 풍경과 현지 일정, 느낀 점을 골고루 담았습니다. 특히 '대마도는 일본보다 한국에 더 가까이 붙어있지만 분명 일본 땅'이라는 주장한 대목이 눈길을 끕니다. 여행기를 쓰고 싶은 독자들이 참고할 수 있는 예문으로 소개합니다.

지난 주말 친구들과 1박 2일간 대마도를 다녀왔다. 서울에서 아침 6시 KTX를 타고 부산에 도착, 11시 대마도행 Ocean Flower 호에 승선, 2시간 만에 대마도의 수도인 이즈하라嚴原 항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대마도의 남북섬을 연결하는 만관교まんぜきばし를 건너 북섬으로 넘어와 아소만의 절경과 와타즈미 신사를 보고 부산항이 보인다는 한국 전망대와 미우다 해수욕장을 거쳐 히타가츠로 와서 오후 4시에 대마도를 떠났다.

길거리 보도블록을 보아도 한 치 어긋남 없이 촘촘하게 잘 깔려 있고, 시내 박물관 공사장에는 (안내자 설명에 따르면) 건축 허가증이 38장이나 붙어 있다. 건축 규제가 까다로운 만큼 길거리 구조물이나 건물들은 안전할 것이다. 도심의 시내를 흐르는 하천은 맑고 깨끗하여 물고기들이 환하게 들여다 보인다. 그리고 삼나무, 편백나무 숲에서 나는 피스타치오 향기가 우리 일행들을 상쾌하게 한다. 자동차는 거의 모두 뒤가 잘라진 소형차들인데 일본 사람들은 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한다. 외딴섬이지만 역시 일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마도는 제주도의 4할 정도되는 땅에 해안선의 길이는 제주도의 2배 정도 된다. 그만큼 해안선이 길고 복잡한 리아시스식 해안이다. 인구는 과거 10만 명에서 이제는 3만 명 정도라 한다. 제주도가 60만 명이니 대마도 인구보다 무려 20배나 많다.

대마도(사진=장시정)
대마도(사진=장시정)
대마도(사진=장시정)
이즈하라 숙소에서 본 아침 해[2019.5.12. 일](사진=장시정)
​대마도(사진=장시정)
​이즈하라 숙소에서 본 바다 야경-오징어 배 불빛 [2019.5.11. 토](사진=장시정)

이번 대마도 방문으로 2명의 역사상 인물을 알게 되었다. 대마도 초대 번주였던 소 요시토시宗 義智와 아버지를 따라 부산으로 와서 소년 시절부터 조선과 인연을 맺고 춘향전을 최초로 외국어(일어)로 번역한 나카라이 토스이半井 桃水에 관한 이야기다. 물론 토스이의 이야기에 그의 영원한 정인情人이었던 히구치 이치요?口 一葉의 이야기를 빠뜨릴 순 없다.

대마도는 조선을 치기 위한 전초기지였나, 조선과의 화평에 앞장섰던 선린善隣이었나? 이즈하라 시내 중심 주택가인 나카무라中村지구 초입에는 대마도를 5백 년간 다스려온 소 씨 집안의 소 요시토시宗 義智1568~1615의 동상이 서있다. 그는 대마도의 19대 도주이자 초대 번주로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회유정책으로 그의 휘하에 있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의 사위가 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임진왜란 시 왜군의 선봉장으로 동대문으로 서울에 무혈입성한 인물로서 아우구스티노란 세례명을 가진 천주교도이다(임진왜란 시 남대문으로 무혈입성한 왜장은 가토 기요마사다. 일제시대 도시계획으로 서울의 성곽과 4대문을 허물면서 왜군이 무혈입성하였던 이 두 대문은 남겨 두었다 한다)

소 요시토시의 동상 하단에 있는 동판의 설명을 보면 "그는 조선과의 우호통상에 봉사한 삶을 살았다. 임진왜란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수로부터 조선과의 관계 회복을 명받고 10년에 걸쳐 노력한 끝에, 1607년 조선 통신사의 초빙에 성공했고 1609년 기유약조己酉約條를 맺어 임진왜란 이후 끊어진 조선과의 교류를 재개하는데 앞장섰고 도쿠가와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아 독립적으로 조선과 교역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고 적혀 있다.

이즈하라 도심을 흐르는 시냇물- 투명한 물속으로 물고기들이 보인다.(사진=장시정)
이즈하라 도심을 흐르는 시냇물- 투명한 물속으로 물고기들이 보인다.(사진=장시정)
이즈하라 시내 박물관 공사장에 나붙은 건축 허가장들.(사진=장시정)
이즈하라 시내 박물관 공사장에 나붙은 건축 허가장들.(사진=장시정)
'이왕가종가백작어결혼봉축기념비'.(사진=장시정)
나카라이 토스이半井 桃水 생가에 있는 그의 안내판.(사진=장시정)
'이왕가종가백작어결혼봉축기념비'.(사진=장시정)
'이왕가종가백작어결혼봉축기념비'.(사진=장시정)

후일 그의 소씨 집안 9대손인 소 다케유키宗 武志가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와 정략결혼했다. 덕혜옹주는 소 다케유키와 결혼한 후 시가인 대마도에 들러 시가 식구들에게 인사를 하고 갔다 한다. 이즈하라에는 지금도 이들의 결혼을 기념하는 "이왕가종가백작어결혼봉축기념비李王家宗家伯爵御結婚奉祝記念碑'라는 긴 이름의 기념비석이 세워져 있다. 일제시대 이왕가로 격하된 조선 왕가와 대마도의 소 씨네 백작 집안 간의 결혼을 축하하는 기념비라는 뜻이다. 주위에서 봄에 붉은 잎이 돋아나는 홍가시 나무들을 볼 수 있었다.

이즈하라의 나카무라 지구에는 여기에서 태어난 메이지, 다이쇼 시대의 인기 작가였던 나카라이 토스이半井 桃水1860-1926의 기념관이 있다. 그의 집안은 원래 번주인 소 씨의 주치의 집안이었다. 토스이는 어릴 때 부친을 따라 부산의 왜관에서 살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고 한국어를 익혀 후일 1882년 춘향전을 일어로 번역하였다. '계림정화 춘향전'鷄林情話 春香傳이란 제목의 일어 춘향전은 최초의 외국어 번역 춘향전이다. 1875년 16세부터 도쿄의 영어학교英學塾를 다녔고 아사히 신문의 촉탁으로 서울에 와있다가 1882년 때마침 일어난 임오군란을 현지 취재하였고 이를 계기로 1884년 아사히 신문사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1885년 '오시츤보'おしつんぼ啞聾子를 발표하는 등 유려한 문체로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한다. 1891년 아사히신문에 연재되었던 그의 소설 '조선에 부는 모래바람'은 한국어로 번역된 책이 있다.

한편 토스이로 부터 문학 지도를 받았던 히구치 이치요?口 一葉1872~1896 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는 이치요가 25세로 요절한 후 발굴된 그녀의 일기를 통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의 근대 최고 여성 작가라는 이치요는 도쿄의 유곽 동네를 배경으로 한 성장 소설 '키 재기'로 일본의 국민 소설가로 명성을 얻었고, 게이샤 등 일본 하층민 여성을 소재로 한 것등 모두 22편의 소설을 발표하였다. 이치요는 25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하였지만, 그녀의 문학 스승이자 마음속의 정인情人이었던 토스이를 향한 연민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2004년 발행된 5천엔 권 지폐에는 이치요의 초상이 담겨 있다.

히구치 이치요의 초상이 삽입된  5천엔 권 지폐.(사진=장시정)
히구치 이치요의 초상이 삽입된 5천엔 권 지폐.(사진=장시정)
미우다 해수욕장.(사진=장시정)
미우다 해수욕장.(사진=장시정)

대마도 여행에서 딱 한번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첫날 이즈하라항 입국장에서였다. 몇 안 되는 입국 심사원들이 거의 무표정하거나 아니면 인상을 찌푸린 채로 긴 줄을 늘어선 한국 방문객들을 대하고 있었다. 양 손가락을 기계에 대고 얼굴 사진을 찍는 과정에서 말 대신 손짓으로 지시하는 듯한 모습도 연출되고 있었다. 말이 안 통하니 그러려니 했지만 전체 입국장 모습은 다소 살풍경해 보였다. 작금의 손상된 한일 관계 때문일까? 평소 일본에 대한 호감이 싹 가시는 듯했다.

입국 심사를 마치고 나와서 우리 일행들이 주차장 한편에 모여 서서 관광 안내자의 설명을 듣고 있을 때 누군가 내 등을 밀치면서 지나가는 게 아닌가. 돌아 보니 일본 입국 심사원인지 세관원인지는 모르겠으나 젊은 일본 사람이었다. 아마도 우리 일행들이 길을 막고 서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일본 사람들 특유의 '스미마셍すみません'이라는 말 한마디 정도는 할 법한데 아무 말 없이 그냥 우리를 밀치고 걸어갔다.

일본 사람들이 변한 것인지, 우리가 변해서 그런 것인지? 불쾌한 생각이 대마도를 다녀온 지금도 내심 잊히지 않는다. 급랭한 한일 관계도 문제지만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고 간다거나 꽃 구경한다고 개인 집 뜰 안까지 들어가는 개념 없는 한국 관광객들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겠다. 이즈하라 시내에는 한국인 출입 금지 팻말을 붙인 가게들도 생겨났다 한다. 물론 히타카츠 시내에는 '친구야' 같은 한국인에게 친밀한 카페도 있다. 아무튼 두 손가락과 얼굴의 생체 정보까지 요구하는 일본의 입국심사는 예전부터 악명 높다.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면서 이제는 일본처럼 생체 정보를 요구하는 곳이 점차 늘어나고 있음을 본다. 아마도 수많은 한국인들의 생체 정보를 한국이 아닌 일본이나 미국에서 갖고 있을 것이다.

​이즈하라嚴原에 있는 '소 요시토시宗 義智' 초대 대마 번주의 동상.(사진=장시정)
​이즈하라嚴原에 있는 '소 요시토시宗 義智' 초대 대마 번주의 동상.(사진=장시정)

대마도는 일본보다 한국에 더 가까이 붙어있지만 분명 일본 땅이다. 이를 아쉽게 여기거나 조상들의 무능함으로 일본에 빼앗겼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트러블을 만드는 일은 피하는 게 좋겠다. 요즘 긴장관계에 있는 일본이라서 더욱 그렇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섬들이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에 속하는 경우는 많이 있다. 해양 영토를 결정하는 기준은 물리적인 거리가 아니다. 누가 더 해양 진취적인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터키의 소아시아 반도에 바짝 붙어 있는 많은 섬들이 터키가 아닌 그리스 섬 들이다.

1951년 맺어진 연합국과 일본 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패전 후 일본이 돌려주어야 할 영토에 독도가 빠지면서 독도 영유권이 불명확하게 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정병준 교수의 '독도1947'을 보면 1947. 3월 미국의 초안에 포함되었던 독도가, 대마도와 파랑도를 우리 땅으로 주장하면서 미국의 불신을 야기하여 최종적으로 반환 대상에서 빠지게 되었다 한다. 우리의 대마도 요구는 다분히 정치적인 것이었고 파랑도 요구는 그 좌표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이루어졌다. 당시 주미 대사관의 한표욱 서기관은 독도와 파랑도가 울릉도 근해에 위치하는 것으로 미 국무부에 설명했다고 한다.(물론 본부 훈령에서 섬의 좌표에 대한 정보가 없었을 것이다. 당시 한국은 전쟁 중이었다) 그런 연유로 한국 정부의 주장은 신뢰를 잃게 되었고 지금까지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한일간의 분쟁이 이어지고 있다. 아쉬운 대목이다.

저작권자 © 자연치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