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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철의 ‘이순신, 오해와 진실’(2)] “우리는 어찌 늘 쪼개지고 분열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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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철의 ‘이순신, 오해와 진실’(2)] “우리는 어찌 늘 쪼개지고 분열하는가?”
  • 김동철 박사
  • 승인 2019.05.13 19: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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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김구는 대한민국의 정통성 시비에서 대척점에 서 있어
이순신 흠모한 이승만과 김구…해방 후 통일과정서 뜻 달라져
후세 사람들은 두 인물 갈라놓고 서로 다른 붕당 짓기 시작

경남 창원시 진해에는 의미심장한 두 개의 상징물이 서있다. 이 상징물들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백범 김구 상해임시정부 주석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오늘날 일제 치하 독립운동과 관련, 미국에서 활동한 이승만 전 대통령과 중국에서 활동한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의 정통성 시비에서 대척점에 서있다. 그것은 후세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사상과 선호도에 따라 이승만과 김구를 자기편 ‘우상(偶像)’으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이 두 분은 한평생 오로지 대한독립을 소원으로 살아온 애국지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은 이 둘을 갈라놓고 서로 다른 붕당을 짓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찌 늘 쪼개지고 분열하는가?

진해시 도천동 북원광장에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서있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북한 정권이 남침을 함으로써 벌어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4월 13일 진해에서 이순신 장군 동상 정초식이 열렸다. 1952년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6주갑(360년)이 되던 해였다. 동상 제막식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을 비롯하여 정부 요인과 많은 시민들이 참여했다.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이순신 장군 동상의 좌대 중앙에는 ‘충무공이순신상(忠武公李舜臣像)’이라고 새겨져 있다.

진해 북원광장에서 이순신 장군 동상 제막식에 참석한 이승만 전 대통령
진해 북원광장에서 이순신 장군 동상 제막식에 참석한 이승만 전 대통령

1950년 11월 11일 해군 창설 5주년을 맞이하여 당시 통제부 사령관인 김성삼 소장이 경상남도 지사에게 건의해서 이루어졌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고 임진왜란의 종결자로 최고의 공로자입니다. 그 해전의 터가 진해 앞바다이므로 진해에 동상을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는 취지였다. 그리하여 마산, 창원, 통영, 고성, 김해 등지에서 3천만 원의 기금을 모았다. 높이 4.82m, 무게 3톤의 동상은 조각가 윤효중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1951년 3월 말 경에 이은상, 이은호 등이 역사적 고증 작업을 거쳐 오늘날에 이른다.

풍전등화, 전쟁의 참화로 나라가 쑥대밭이 되어 가던 때 그나마 역사 속에서 이순신 장군을 찾아서 나라 사랑 충이라는 대의명분을 살리려 한 당시 위정자들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을 알 것도 같다.

담장이 무너지고 기왓장이 떨어져 내리는 토붕와해(土崩瓦解)의 대한민국은 반만년 역사에서 대륙과 해양세력의 격전지가 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백성은 콩가루가 됐고 곤죽이 되어 죽어갔다. 오호 애재라!

북원광장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다면 그 반대쪽 남원로터리에는 이충무공 시비가 우뚝 서있다. 이 시비는 광복 이듬해 1946년 5월 대한민국 임시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이 삼남지방을 순시하고 한산도를 들른 뒤 진해를 방문하고 세운 것이다. 조국 광복의 기쁨을 화강암에 친필로 새겨 넣은 것이다.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 ‘바다에 맹서하니 어룡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는구나’는 뜻이다.

진해 남원로터리 김구 선생 친필 시
진해 남원로터리 김구 선생 친필 시

이 시구는 이순신 장군이 우국충정을 담아 쓴 진중음(陣中吟)에 나타나 있다.

천보서문원(天步西門遠) 임금의 수레 서쪽으로 멀리 가시고

군저북지위(君儲北地危) 왕자들은 북쪽에서 위태로운데

고신우국일(孤臣憂國日) 나라를 근심하는 외로운 신하

장사수훈시(壯士樹勳時) 장사들은 공로를 세울 때로다

서해어룡동(誓海魚龍動) 바다에 서약하니 어룡이 감동하고

맹산초목지(盟山草木知) 산에다 맹세하니 초목이 아는구나

수이여진멸(讐夷如盡滅) 이 원수들을 모조리 무찌른다면

수사불위사(雖死不爲辭) 이 한 몸 죽을지라도 마다하지 않으리

1592년 6월 2일 고성 적진포해전을 끝냈을 때 이순신 장군은 전라도사 최철견으로부터 선조가 평양으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 이 어이 마른 하늘에 벼락같은 소리인고... 눈물을 흘리며 여수 본영으로 돌아온 이순신 장군은 침통한 마음을 다스리려 진중음을 남겼다.

이 시비는 건립 당시 진해 북원광장에 있었으나 후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세워짐으로써 1954년 남원광장으로 옮겨졌다. 비석의 높이는 2.82m, 폭은 0.44m.

비석 옆면에는 대한민국 29년 8월 15일 김구 근제라는 글씨가 있다. 대한민국 29년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을 기점으로 볼 때 1948년을 뜻한다. 여기서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연도를 1919년으로 봐야한다는 측과 1948년으로 해야 한다는 측과의 다툼이 오늘날 대한한국을 분열시키고 있다.

김구 선생 한산도 방문사진
김구 선생 한산도 방문사진

 

한산도 제승당
한산도 제승당

김구 선생은 진해 방문 전 이순신 장군의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한산도를 찾아 충무공 영정에 참배했다. 이때 제승당이라는 현판이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그 연유를 물은 즉, “왜정 시대 때 떼어낸 것”이라는 말을 듣고 다시 달게 했다.

한평생 조국 독립에 몸 바치고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이 두 분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서로 앙숙(怏宿)처럼 으르렁거리는 사이는 아니었다. 다만 해방 후 통일 과정에서 서로의 뜻이 달랐지만,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한결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이 두 분에게 부담을 주고 있는가?

해방을 맞이해서 이순신 장군을 찾은 김구 선생과 한국전쟁 때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처음으로 세웠던 이승만 전 대통령의 행위가 마음에도 없는 보여주기식 ‘정치’라는 말인가.

<김동철 박사 약력>

▲교육학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이순신리더십 국제센터 운영자문위원장

▲성결대 교양학부 객원교수

▲전 중앙일보 기자-월간중앙 기획위원

▲경복고-한국외국어대학교-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명지대 대학원 졸

▲저서: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우리가 꼭 한번 만나야 하는 이순신(이순신 리더십 특강)’

‘이순신 유적 답사기1’

▲논문:

‘이순신의 청렴 인성 리더십’

‘나라사랑 충, 부모사랑 효, 백성사랑 애민, 부하사랑 소통, 거북선 창제의 창의력’

‘충무공 이순신 시조에 나타난 인성’

‘이순신과 원균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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