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한가로운 풍경과는 아주 동떨어진 뜻
“흉노족 침입 경계하라”, “전쟁 일어날 위험한 계절” 의미

누구나 한 번쯤 들은 말에 ‘천고마비’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뜻으로, 흔히 가을의 풍요로움을 설명할 때 씁니다. 하지만 이 말에는 좀 이상한 구석이 있습니다. 말이 살찌는 것과 사람이 풍요로운 게 무슨 상관이냐는 점입니다. ‘말도 살찌는 계절이니, 말을 기르는 사람은 두말해서 무엇하겠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말이 살찌는 것이 곧 사람의 풍요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이 말은 원래 그렇게 좋은 뜻으로 쓰인 말이 아닙니다. ‘한서(漢書)’에 나오는 이 말은 “북방의 흉노족이 봄부터 여름까지 초원에서 키운 말들이 잔뜩 살이 쪘으니, 이제 곧 남쪽으로 쳐들어와 식량과 가축을 노략질해 갈 것”이라는, 경계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가을의 한가로운 풍경과는 아주 동떨어진 뜻이죠.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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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시성(詩聖) 두보(杜甫)의 종조부인 두심언(杜審言)이 북쪽 변방을 지키러 나간 친구 소미도(蘇味道)에게 보낸 편지에도 ‘秋高塞馬肥(추고새마비)’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이는 “가을 하늘이 높으니 변방의 말이 살찌는구나”라는 뜻으로, 여기에도 “흉노족의 침입을 경계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중국 하면 떠오르는 만리장성도 진시황제가 북쪽의 흉노족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지요. 즉 ‘천고마비’는 “하늘이 맑고 모든 것이 풍성하다”는 낭만적인 의미가 아니라 “전쟁이 일어날 위험한 계절”이라는 무서운 뜻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물론 지금은 그런 속뜻은 사라지고, 글자의 의미만 남아 가을의 풍요로움을 뜻하는 말로 쓰입니다.

요즘이야 ‘세계의 평화’가 지구촌의 최대 화두여서 거의 일어나지 않지만, 옛날에는 참 많은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어쩌면 이민족의 영토를 빼앗거나 이민족의 침략을 막는 ‘전쟁의 역사’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전쟁은 사람들의 말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마련이지요.

★사면초가(四面楚歌: 사방에서 들려오는 초나라의 노래),

★배수진(背水陣 : 등 뒤에 물을 두고 쓰는 진),

★와신상담(臥薪嘗膽 : 섶나무 위에서 자고 쓸개를 맛본다),

★궁여지책(窮餘之策 : 막다른 처지에서 생각하다 못해 내는 계책) 등이 전쟁 때문에 만들어진 말입니다.

흔히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시작돼 나온 맨 처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는 ‘효시’도 전쟁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효시(嚆矢)라고 하면 말 그대로 ‘우는 화살’인데요. 옛날 중국에서 전쟁을 시작할 때 ‘우는 화살’을 먼저 쏘아올린 데서 유래한 말이랍니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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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관련한 말이 많다 보니 괜한 오해를 받는 말도 있습니다. ‘화냥년’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항간에 “‘화냥년’이라는 말은 고려 말 몽고전쟁 때 몽고에 끌려갔다가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여자, 즉 ‘환향(還鄕)한 여자’들을 도덕적으로 부정하다고 생각해 지칭한 것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자자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우리나라 문헌에서 ‘화냥’이라는 말이 처음 나타난 것은 조선시대 17세기 역학서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인데요. 여기서 ‘화냥’은 중국어 ‘양한(養漢)’의 의미이고, ‘養漢’이란 “여자가 남자와 눈이 맞아 혼외정사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게 국립국어원의 견해입니다. 이런 말을 쓰지 않는 것이 바른 언어생활이지만, 아주 이상한 속설이 떠돌아다니기에 한번 짚어 봤습니다.

가을의 풍요를 뜻하는 말로 ‘오곡백화’도 무척 많이 쓰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예나 지금이나 바른말이 아닙니다. 방송과 신문에서 “오곡백화가 익어가는 가을 들녘” 따위 표현을 쓰는데요. ‘오곡백화’라고 하면 말 그대로 “5가지 곡식과 100가지 꽃”입니다. 뜬금없는 꽃 타령이 좀 생뚱맞습니다. 꽃으로는 배를 채울 수 없고, ‘꽃이 익어 간다’는 누구도 쓰지 않는 표현입니다.

‘오곡백화(五穀百花)’는 ‘오곡백과(五穀百果)’로 써야 하는 말입니다. 이때의 ‘오곡’은 5가지 곡식이 아니라 모든 곡식을 이르고, ‘백과’는 100가지 과실이 아니라 세상의 온갖 과실을 뜻합니다. 가을의 수확과 관련해 자주 틀리는 말로는 ‘나락’도 있습니다. “나락이 제대로 여물고 볏짚도 잘 말랐다” 따위로 널리 쓰이는 ‘나락’ 말입니다.

하지만 ‘나락’은 ‘벼’의 사투리입니다. 이 ‘나락’이 바른 표현으로 쓰일 때도 있습니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네’라고 할 때 쓰는 ‘씨나락’ 같은 경우이지요. ‘나락’은 ‘벼’의 사투리이고, ‘씨나락’은 ‘볍씨’의 사투리입니다. 하지만 속담에 들어 있는 사투리는 표준어로 고쳐 쓰지 않고 그대로 쓰는 것이 원칙입니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한다’를 ‘귀신 볍씨 까먹는 소리 한다’로 쓰면 어색하니까요.[엄민용 기자 / 경향신문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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