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조선민족독립 막으려 조선어학회사건 조작

일본은 1937년 중국과 전쟁을 일으키면서 그 전쟁에 우리 겨레를 동원하려고 내선일체정책을 펴고 학교에서 조선어교육을 안 하고 학생들이 우리말을 쓰지도 못하게 하면서 1940년에는 일본식으로 성씨와 이름을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행한다. 그리고 1941년에 미국의 진주만 폭격을 시작으로 동남아와 중국까지 침략하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우리 겨레를 그 전쟁터에 군인, 노무자, 위안부로 끌고 간다. 그리고 황국신민화 정책을 펴면서 소학교 이름도 ‘국민 학교’로 바꾸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민족주의자들을 회유 친일분자로 만들고 민족 운동 단체를 해산한다.

그러던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을 조작해 조선어사전을 만드는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그 도움이들까지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학회도 강제 해산시킨다. 내선일체 정책으로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친일파가 되었는데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그들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어사전 만들기는 민족독립운동이라고 규정하고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48명을 조사하고 33명을 입건한 것이다. 이 학회의 여러 인물들이 우리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믿고 지난날 신간회와 수양동우회 사건 인물들이고,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내통하거나 민족운동을 하는 이들이 많이 있어 조선어학회를 민족주의자들 집결지로 본 것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된 33명은 이윤재, 한징,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이중화, 이우식, 김법린, 이인, 김양수, 김도연, 장현식, 장지영, 정열모, 김윤경, 이석린, 권승욱, 이만규, 이강래, 김선기, 이병기, 서승효, 윤병호, 이은상, 정인섭, 서민호, 안재홍, 신현모, 김종철, 권덕규, 안호상 들이었는데 사전 만들기 전문가인 국어학자와 민족운동가, 재정지원자와 후원자들이었다. 그런데 이윤재, 한징 두 분은 모진 고문과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옥에서 돌아가셨다. 기소된 33명 말고도 곽상훈, 정세권, 김두백, 백낙준, 임형규, 김연준 들 표준어 만들기와 후원금을 낸 이들도 유치장에 가두고 조사를 받고 고초를 겪었다.

1949년에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이들이 모인 십일회 모습 찍그림.
1949년에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이들이 모인 십일회 모습 찍그림.

일제는 이들을 형무소에 가두고 민족독립 운동을 했다는 자백을 받아내려고 물 먹이기, 공중에 매달고 때리기, 메어치기, 난장질하기, 불로 지지기, 동지끼리 서로 때리기 들들 모진 고문을 했다. 그렇게 옥살이를 하던 중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망했는데도 조선어학회 분들을 옥에서 내보내지 않아 함흥 유지들이 형무소에 항의해 8월 17일에 풀려나왔는데 어떤 분은 들것에 실려서, 어떤 분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오더란다. 만약에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지 않고 더 세월이 흘렀다면 더 많은 사람이 죽고 우리 말글과 민족은 사라졌을 지도 모른다. 유럽, 미국, 일본들에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들이 편한 직장을 버리고 독립운동을 것을 우러러볼 일이다.

다행히 광복이 되어 일제에 빼앗겼던 우리말 사전 원고를 서울역 창고에서 찾고 조선어학회가 다시 활동을 시작해 교과서도 우리 말글로 만들고 우리말 사전도 낼 수 있었다. 광복 뒤 조선어학회는 한글교과서를 만들어 미국 군정청에 기증하고 미국 군정청에 최현배(편수국장)와 장지영(편수 부국장) 이병기(편수과장)와 김선기(편수관)가 들어가서 교과서를 한글로 만들고 한글 교육 책임자로 일했다. 한편 조선어학회는 한글교사를 양성하면서 일제가 못쓰게 한 우리말을 도로 찾아서 쓰기 운동을 했다. 미 군정청은 1946년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해 경축했다. 1947년에는 안재홍이 미 군정청 민정장관이 되는 등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많은 일을 한다.

조선어학회가 한글로 만들어 미 군정청에 기증한 교과서 “한글 첫 걸음”
조선어학회가 한글로 만들어 미 군정청에 기증한 교과서 “한글 첫 걸음”

그런데 조선어학회 주장과 정신은 우리말을 한글로 적는 말글살이를 해서 우리겨레 얼을 지키고 튼튼한 나라를 이루는 것인데 불행하게도 광복 뒤 남북이 갈라지는 바람에 조선어학회 사람들도 둘로 갈라져서 남북에서 활동한다. 남쪽은 1948년 대한민국 건국 때 조선어학회 회원인 안호상이 초대 문교부장관이 되어 한글전용법을 만들고 2대 문교부장관에 백낙준, 3대 문교부장관에 김법린, 문교부 차관에 김선기, 편수국장에 최현배들이 임명되어 교과서를 한글로 만들고 한글 살리고 빛내기에 힘쓴다. 또한 대한민국 초대 법무장관에 이인, 재무부장관에 김도연 들 학회 회원이 맡아 나라 기틀을 잡는 일을 했다.

북쪽은 주시경 제자 김두봉과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지낸 이극로와 이만규 들 여러 회원들이 조선어학회 주장과 정신을 남쪽보다 더 잘 실천했다. 그러나 남쪽은 이희승이 일본말을 일본처럼 한자로 적자는 한자혼용을 주장해서 오랫동안 문자전쟁이라고 할 정도로 한글전용과 한자혼용 주장자들이 싸웠다. 다행히 우리말을 한글로 적는 말글살이를 하자는 주장이 승리하는 가 했더니 미국말 섬기기 바람이 일어 우리 말글이 다시 어렵게 되었다. 하루빨리 남북이 하나 되어 일제 때 목숨을 바쳐서 우리말을 지킨 조선어학회 정신으로 우리 말글을 빛내야겠다. 우리 말글은 빛내는 일은 우리 겨레가 빛나는 일이다.

우리 말글을 지키고 갈고 닦은 일은 그 어떤 겨레사랑운동보다 가장 크고 훌륭한 독립운동이고 건국 준비운동이었다. 이 이 큰 말글 독립운동을 하다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살이를 하고 목숨을 잃은 분들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우리말 독립운동에 앞장을 서다가 1940년에 우리 말글 말살정책을 강행하는 일본에 항거해 1940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신명균님과 우리 말글을 지키고 살리려고 애쓴 모든 분들, 그리고 조선어학회가 그 큰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많은 분들에게 고마운 절을 한다. 그리고 또 다시 나라 빼앗기고 제 말글을 지키려고 목숨까지 잃는 일이 없기를 빌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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