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정 독일모델연구소 대표]

루트비히 2세
루트비히 2세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Wittelsbach 왕조는 막시밀리안 1세가 1806년 창건하여 1차 대전 패전 직후인 1918년 루트비히 3세 때 바이마르공화국으로 통합되면서 막을 내렸다. 1세기 남짓 비교적 단명했던 비텔스바흐 왕조에서 사람들이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왕이라면 바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건립한 루트비히 2세일 것이다.

그는 재임 시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포함한 3 개의 성을 건축하느라 재정난을 야기했고 이것이 단초가 되어 자신의 왕조와 정부에 의해 퇴위 압력을 받았다. 결국 호수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비운의 루트비히 2세, 그래도 그가 후세에 바이에른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왕이라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노이슈반슈타인성과 호엔슈반가우성
노이슈반슈타인성과 호엔슈반가우성

루트비히 2세라 하면 그가 건설한 3개의 성을 떠올리게 된다. 퓌센Fuessen의 노이슈반슈타인성, 오버암머가우Oberammergau의 린덴호프성 그리고 킴제Chiemsee 호수 안의 섬에 위치한 헤렌킴제성이 그것이다. 노이슈반슈타인성은 중세 기사의 성 모습이고 린덴호프성은 로코코 스타일, 헤렌킴제성은 베르사이유성을 모델로 했다. 이들 성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글에 게재하기로 한다.

루트비히 2세가 당시 바이에른 왕국의 정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게 된 이유는 크게 2가지이다. 하나는 왕으로 즉위하기 전 바그너의 로엔그린 공연을 보고 감명을 받은 후 왕이 된 후 그를 바이에른으로 초청하면서 그의 혁명적 이미지를 싫어하던 보수적인 사람들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고 그의 재위 시절 착공한 노이슈반슈타인, 린덴호프, 헤렌킴제 3개의 성을 건축하는데 들어간 비용 조달로 나라의 재정이 고갈된 것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호엔슈반가우성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성 내에 전시된 독일의 전설을 그린 그림들에 매료되어 성 주위의 자연을 벗 삼아 성장하였다. 호엔슈반가우성은 노이슈반슈타인성 건축 전부터 그 아래 쪽 인근에 있었던 성이다. 이렇게 길러진 그는 자연 친화적이며 낭만적인 기질을 갖게 되었고, 문학에 심취하고 특히 실러의 시와 드라마가 갖는 연민을 사랑했다.

그의 이러한 서정적인 스타일은 이상향적 심리와 낭만주의에 열광하면서 세속적인 세계로부터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16세 때 바그너의 로엔그린 공연을 보고 자신의 낭만적인 꿈이 실현됨을 보았고 이후 바그너의 모든 저작물을 수집하는 등 그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루트비히 2세는 1866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이나 1870년 프랑스와의 전쟁도 내키지 않았으나 바이에른 정부의 압력에 마지못해 참전을 승인할 정도로 평화주의자였다.

​1864년 만 18세 때 왕이 되었고 바그너를 바이에른으로 초청하게 되지만 정부 인사들의 반대로 그는 결국 1년 반 만에 뮌헨을 떠나게 된다. 당시 왕궁에 초청된 바그너는 루트비히 2세를 만난 첫인상을 이렇게 기술했다. "그는 너무 고귀하고 당당하고 영혼 가득하여 조악한 세상의 탁류에 휘말려 사라지게 될까 두렵다. 그는 지금껏 보지 못한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이 날 바그너는 그로부터 무엇을 보았을까, 결국 바그너가 남긴 첫인상대로 루트비히 2세는 세상의 탁류에 휘말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린덴호프성과 헤렌킴제성
린덴호프성과 헤렌킴제성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호엔슈반가우성 인근 언덕배기에 원래의 호엔슈반가우성의 폐허가 남겨져 있었고 여기에 그의 부친인 막시밀리안 2세가 새로 성을 지으려고 했다. 1869년 9월 루트비히 2세는 부친의 꿈을 이어 받아 새로운 성을 축성하기 시작하는데 이 성이 호엔슈반가우성 인근의 고지에 지어진 오늘날 유명한 노이슈반슈타인 성이다.

17년간 공사가 계속되었지만 루트비히 2세는 완공을 보지 못하고 비운의 죽음을 맞았다. 노이슈반슈타인성이 착공된 지 5년 후에 린덴호프성이 착공되었고 또 그 4년 뒤에 헤렌킴제성이 착공되었는데, 무리한 재정 투입으로 그가 죽은 1886년 정부의 부채는 1,300만 마르크였고 그의 사후에 이 부채는 2,100만 마르크로 불어나 있었다. 그 해 바이에른의 정부 수입이 550만 마르크였다 하니 그 부채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다.

이 부채는 왕실이 바이에른 정부에 빚진 것으로 왕실의 재산을 팔아 변제할 수밖에 없었고, 비텔스바흐 왕조 이 전부터 8백 년간 축적된 재산을 1세대 만에 날릴 위기에 처했다 한다. 그래서인지 왕실 내에서도 루트비히 2세의 반대 세력이 많았고 이들은 정부 인사들과 함께 왕이 정신적으로 정상이 아니라는 진단을 내려 그를 폐위하고 그의 삼촌인 루이트폴트를 섭정으로 내세우는 음모를 꾸민다.

당시는 독일제국 시절로서 바이에른 왕의 폐위에는 독일제국의 황제인 빌헬름 1세의 추인이 필요하여 베를린에 특사를 보냈으나 당시 제국 총리였던 비스마르크가 루트비히 2세에 대한 퇴위 음모임을 간파하고, 루트비히 2세의 퇴위 여부는 바이에른이 자체적으로 판단할 일이라 하여 이를 추인치 않았다.

한편 루트비히 2세도 비스마르크에게 전보를 보내서 도움을 요청했고 비스마르크는 빨리 뮌헨으로 돌아가서 국민들 앞에 모습을 보이고 의회에 대하여도 그의 권리를 주장하게 되면 퇴위 음모는 저절로 분쇄될 것이라면서 이를 권유하였다. 비스마르크는 루트비히 2세가 왕세자였던 청년 시절 당시 바이에른을 방문하여 그를 독대를 한 적이 있는데 상호 간에 좋은 인상을 가졌고 그 후 지속적으로 연락을 하며 지냈다 한다.

루트비히 2세의 퇴위 음모에 유다 역할을 한 사람은 홀른슈타인Holnstein 백작이었고 정부 내에서는 루츠Lutz 총리가 앞장섰다. 그들에게는 재정난으로 인한 정부의 위기로 그들의 지위가 상실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 자신들의 왕을 퇴위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게 된다. 1886. 6월 루트비히 2세를 단 한 번도 직접 진단해 보지도 않았던 4명의 의사들이 그에게 불치의 정신병이란 진단을 내렸다. 그의 주치의였던 막스 요셉Max Joseph은 그 진단이 설득력이 없다며 항변했고 내각 담당 처장이었던 슈나이더 역시 왕이 정신병자라는 어떤 징후도 찾아볼 수 없다며, 그 증거로 수년간 왕의 서면 명령과 지시서를 제출하고 항변했지만 고려되지 않았다.

부모인 막시밀리안 2세 국왕과 왕비 마리, 그리고 동생 오토와 함께(루트비히 2세는 맨 왼쪽)
부모인 막시밀리안 2세 국왕과 왕비 마리, 그리고 동생 오토와 함께(루트비히 2세는 맨 왼쪽)

1886. 6.9. 바이에른 정부는 루트비히 2세를 정신병으로 인한 통치 불가 선고 형식으로 사실상 퇴위시켰고 다음날 그의 삼촌인 루이트폴트 왕자가 섭정 자리에 올랐다. 그날 6.10. 새벽 루트비히 2세를 유폐시키려는 11인의 위원회 사람들이 의사들을 대동하고 몇 대의 마차를 타고 왕이 머물고 있는 노이슈반슈타인성 문밖까지 와서 들어오려고 했지만 경비병들의 제지로 돌아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루트비히 2세는 자신을 향하고 있는 퇴위 음모를 그제서야 제대로 실감했고 측근인 뒤르크하임 백작을 불러 숙의한 끝에 왕명으로 포고문을 발포케 하였다. 이것에 따르면 왕의 삼촌인 루이트폴트 왕자가 자신의 동의도 없이 자신을 축출하려 하며 정부가 근거 없는 건강 이상설을 흘려 국민을 속이고 이제 반역을 준비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자신은 건강하니 자신을 지켜 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이 포고문은 정부에 의해 차단 당하고 말았다. 밤베르크 저널Bamberg Journal 신문만 이 포고문을 게재하였다 한다.

하지만 루트비히 2세의 저항은 여기까지였다. 그는 더 이상 이렇다 할 조치를 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는 6.10. 노이슈반슈타인 성문 앞에서 소동이 벌어졌던 그날 시종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나의 왕관을 강탈하려 한 것은 최악은 아니다. 그러나 나를 정신병자로 몰아 산 채로 매장한다면 그건 아마도 나의 죽음이 될 것이다" 그러던 중 루트비히 2세는 6.11. 밤 성에 침입한 일단의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침실로 내몰렸고 정부 의사인 폰 구덴von Gudden이 나타나, 그에게 내려진 정신병 진단 결과를 통보하고 뮌헨에서는 루이트폴트왕자가 정권을 인수하였다고 알렸다. 그리고 루트비히 2세를 슈타른베르크 호숫가의 "Berg Castle"산성까지 데리고 와서 유폐시켰다. 이 산성은 한때 루트비히 2세가 머물렀던 곳이나 이미 창문을 폐쇄한 감옥으로 변해 있었다.

6.13. 성령강림절 오후 6시경 루트비히 2세는 폰 구덴박사와 함께 산책을 나섰고 평소 따라붙던 2명의 시종들은 폰 구덴박사의 지시로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이들이 7시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자 이들을 찾아 나섰고 이들은 밤 11경 호수 위 주검으로 떠올랐다. 루트비히 2세의 시신은 부검하였고 언론은 왕의 정신적 결함을 나타내는 "증거"들을 쏟아 내었다. 검시관은 왕의 뇌의 무게가 1349g으로 평균보다 36g이 모자랐다고 하였고 왕의 최근 조용한 거동이 그의 위중한 정신병을 감추기 위한 시도였다고도 했다. 심지어는 바이에른 왕가의 조상으로 알려진 1592년 죽은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가의 빌헬름 공작으로부터 정신분열증 유전인자를 물려받았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러나 왕의 개인적 시중을 들었던 병사 알폰스 베버나 마지막 시종이었던 프리츠 슈베글러는 왕이 정신병이라 할 만한 어떤 징후나 비정상적인 변덕 같은 것을 인지할 수 없었고, 엄청난 배신을 절감한 그가 유폐된 마지막 며칠간에도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조용하고 침착하여 놀랐다고 말했다. 루트비히 2세는 그가 오랫동안 신임하고 은혜를 베풀었던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배신당했다. 그가 비행기를 제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이를 그가 미쳤다는 증거라고 했지만 불과 10년 후 실제로 비행기가 발명되지 않았나. 루트비히 2세는 비통하고 불명확한 미스터리로 생을 마감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바이에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선과 미를 추구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기억되고 있다.

나는 루트비히 2세의 이야기를 쓰면서 불현듯 박근혜 대통령을 떠올렸다. 루트비히 2세의 운명을 1세기 후 인물인 박근혜 대통령과 비교하면 무리일까? 그의 스토리는 삼촌에게 왕위를 찬탈 당한 단종 애사와도 유사하지만 나는 차라리 박근혜 대통령과 비교하고 싶다. 왜 그럴까? 이실직고하면, 나도 현직에 있을 때 박근혜 대통령에 늘 불만을 가졌다. 왜 저렇게 밖에 못할까, 내정도 외교도 모두 불만이었다. 행사시 그와 찍은 제법 큰 사진을 청와대로부터 2번이나 받았지만 액자도 하지 않고 사무실에 비치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와서 보니 그는 참 무난하게 국정을 운영했다. 특히 국가의 독립, 영토의 보전, 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헌법상 대통령의 책무는 틀림없이 지켰다. 약점없는 사람은 없다. 공칠과삼을 망각한 내가 한없이 부끄럽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우선 성장 배경이다. 박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의 딸로 청와대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은 루트비히 2세와 마찬가지로 왕실에서 고운 화초처럼 자란 루트비히 2세의 환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2번째로 성격적인 측면이다. 루트비히 2세는 영원한 문학 소년 같은 수줍은 성격을 가졌고 '동화 왕Maerchenkoenig, a Fairy Tale King'이라고 불릴 정도로 일반 국민들과 유리된 왕이었다. 하지만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의 인격에 매료되었다. 비스마르크나 바그너가 그랬다.

물론 박 대통령은 아버지의 비극을 온몸으로 견디면서 나중에 정치가로 변신하게 된 성공 스토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루트비히 2세처럼 고귀한 귀족적인 풍모를 갖고 있었다. 그가 대통령 재임 시에는 장관들조차 독대하기가 어렵다고 했을 정도였으니 이런 분위기가 일반 국민들에게는 다소간의 부정적 영향을 미쳤으리라 본다. 하지만 그는 수수하고 소박했다. 30년이 넘은 가구나 그의 의상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내가 개인적으로 받았던 인상은 매우 부드럽고 자상한 성격의 소유자란 것이었다. 그것이 비록 피상적이고 의례적인 몇 번의 접촉을 통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3번째가 나에게 가장 어필했던 유사성으로 바로 이 두 사람이 권좌에서 물러나게 된 과정이다. 루트비히 2세는 비현실적인 정치로 자신의 왕실과 정부로부터 미움을 샀고 결국 이들에 의해 폐위되는데, 그 과정이 사실 엉터리였다. 그를 정신병자로 만들기 위해 그를 한 번도 직접 진료해 보지도 않은 의사들로 하여금 정신병 진단을 하게 했다는 것부터 잘못되지 않았나. 여기에 언론이 동원된 온갖 험담이 그에게 퍼부어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
박근혜 전 대통령.

이 사실은 박 대통령과 비교할 수 있는데, 박 대통령이 내란이나 외환의 죄는커녕 돈 한 푼 받지 않았지만 공천 때 소외되었던 자신의 정당 사람들도 참여하는 탄핵에 희생되었고 형사 처분까지 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 언론도 많은 불명예스러운 가십거리들을 그 진위에 관계없이 보도하는 무책임한 행태를 보였다. 산더미 같은 거짓과 떼법이 대통령을 묻었다.

물론 이 두 사람의 정치가 좋은 정치였는지에 대하여는 평가가 엇갈릴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을 권좌에서 몰아내는 과정이 불법적이고 정당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이들이 모종의 음모의 희생자란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마지막으로 우연이겠지만 이 둘은 공히 독신이었다. 루트비히 2세는 오스트리아 프란츠 요셉 황제의 황비였던 엘리자베쓰(시시란 애칭으로 불린다)의 여동생과 약혼한 적은 있지만 결혼하지 않았고, 그래서 배우자의 조력을 받을 수 없었다는 점에서 박 대통령의 사적인 운명과도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마지막 끝만큼은 다르기를 바란다. 아니 다를 것이다. 루트비히 2세는 의문의 죽음으로 끝났지만, 박 대통령은 지금의 난관을 극복하고 국민의 곁으로 돌아올 것이다. 반드시 그럴 것이다.

참조 : Julius Desing, King Ludwig the Second/ His life - His end, Verlag Kienberger, 1976.

​[출처] 루트비히 2세와 박근혜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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