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정 독일모델연구소 대표

취지 이해하지만 선뜻 동의하기는 어려워
정치는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의 일부
일상에서 피해야 할 주제는 아니다
소통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고 유익
보수가 참패한 이번 선거를 계기로
국민정당과 정치 참여적인 민주시민들을
육성하자는 시급한 과제 던져본다

카톡방에서 자주 나오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소위 '정종포'는 거론치 말자는 것이다. 논란의 소지가 있는 만큼 가급적 피해 가자는 것인데, 취지는 이해를 하지만 이런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 단톡방이 특정한 주제를 미리 설정해 놓은 곳이 아니라면 말이다. 정치는 그저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의 일부일 뿐이다. 더욱이 일상에서 피해야 할 주제는 아니며, 이런저런 계기에 소통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고 유익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언젠가부터 정치를 혐오하는 풍토가 알게 모르게 있어왔다. 식민시대로부터 소위 진보라는 사람들이 말하는 군사독재 시대에 이르기까지 지배자들은 국민들이 정치에 갖는 관심을 돌려놓기 위하여 '3 S 정책'(screen, sports, sex)을 구사하기도 했다. 이런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간의 경제 발전에 비해 우리의 정치 인식은 선진적이라 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듯하다.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가 15일 국회도서관 강당에 마련된 개표상황실에서 당대표직 사퇴를 밝히고 있다./연합뉴스/장시정 대표 블로그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가 15일 국회도서관 강당에 마련된 개표상황실에서 당대표직 사퇴를 밝히고 있다./연합뉴스/장시정 대표 블로그

교육을 많이 받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분야에만 관심을 갖고 사회 문제나 정치 문제에 무관심한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들의 인식 한구석에는 정치란 저급한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정치와 지식인들의 격리 현상이 클수록 정치계의 파행은 더욱 큰 방종에 방치될 것이다.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벌 중의 하나는 자신보다 저급한 사람들의 지배를 받는 일이다"라고 한 플라톤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참여적 정치문화는 선진 정치의 시작이다

물론 서양 사회에서도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커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정도가 우리보다 심하지 않고 또 설령 그렇더라도 그들에게는 제대로 된 법치주의와 우수한 정치제도, 그리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이 버텨주고 있다. 여기에 그들은 시민교육citizenship education이나 정치교육politische Bildung을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내가 있었던 함부르크에도 연방정치교육센터가 있다.

아래층에는 서점도 운영하는데 독일의 정치, 선거 제도나 실태, 헌법, 인권, 마약 등 시민 교양에 필수적인 책이나 유인물들을 무료 또는 1~2유로의 극히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고 있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실태나 고발에 관한 책자도 볼 수 있다. 우리도 정치에 대한 공포심을 걷어내고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로, 진정한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정치 플랫폼을 만들어야 하겠다.

가우크 대통령 / 장시정 대표 블로그
가우크 대통령 / 장시정 대표 블로그

엊그제 총선이 끝났다. 한때나마 희망을 걸었던 한 정치인이 개표가 완료되기도 전에 서둘러 퇴장했다. 이건 이기든 지든 책임있는 정치인의 모습은 결코 아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국민들은, 유권자들은 어떤 생각을 떠올렸을까? 연민보다는 분노가 차올랐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 아닐지. 이번 선거에서 투표과정에서의 파행과 투표 결과에 대한 비상식적인 통계 수치에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하고있다.

선거에 진 것은 알겠지만 마무리는 해야 하지 않나. 대체 책임 정치의 모습은 어디서 찾아볼 수 있다는 말인가. 미통당은 총선을 앞두고 숱한 파행을 저질렀고, 선거를 망쳐 대다수 보수 우파 시민들의 여망을 저버렸다. 당 대표라는 단 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그 당을 쳐다보고 있는 수 천만 유권자들을 일거에 농락한 것인데, 국민소득 3만 불의 나라에 어떻게 이런 정치와 정당이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제 확실해진 것은 우리의 정치 시스템, 좀 더 구체적으로는 정당 시스템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지경으로까지 왔으며, 진정한 정치 개혁과 국민 정당의 육성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고 진정한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정치 분야를 최소한 경제 분야만큼은 끌어올려야 한다. 경제는 선진국인데 정치는 후진국이기 때문이다.

독일을 보자. 독일의 국력이 경제력이고 그 힘이 히든챔피언을 주축으로 하는 강력한 중소기업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그 막강한 경제력이 딛고 서있는 것이 바로 그만큼이나 막강한 정치력이다. 2차 대전후 독일의 성공 신화도 합의제를 바탕으로 하는 정치에 그 기반을 두고 있고, 독일 정치는 자질과 도덕성을 겸비한 세계 최고의 정치 전문가 집단이 이끌고 있다. 또한 기민당, 자민당이나 사민당, 녹색당 같은 좌, 우 스펙트럼의 국민정당들이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자유한국당은 총선을 앞두고 정체성도 혼란스러운 미래통합당으로 하루아침에 당명을 바꿨다. 여기에 박근혜 대통령 찬탄파들의 의도가 숨어 있다지만, 대체 자유를 버리고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통합하자는 건가? 국민들과의 소통은 물론 당내에서조차 별다른 논의 없이 몇몇 권력자들이 저지른 스캔달이다. 더 나아가 정치 노선이나 정체성이 다른 정치세력과 야합하고 밀실 공천을 자행하여 국민과 유권자를 우롱하였다. 이런 건 독일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국민과 유권자에 대한 도발이다.

우리 국회나 지방 의회가 이렇게 이합집산하고 조변석개하는 정당들에 기반을 두고 있으니 정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당내 민주화나 정치 엘리트들의 충원과 육성은 그들의 어젠다가 아니다. 그저 패거리 정치를 하다가 선거 때만 국민을 쳐다보는 식이다.

독일 사민당은 백 년도 넘게 사민당이고 기민당, 기사당, 자민당은 전쟁 후 창당된 이래 60~70년 동안 한 번도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미국의 민주당은 200년을 넘겼고 링컨 대통령 때 창당한 공화당도 200년이 되어간다. 일본 자민당도 마찬가지다. 내가 만난 헬무트 슈미트 전 독일 총리는 일본 자민당에게는 그 자유민주당이란 이름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다른 것보다 당내 민주화가 잘되지 않고, 계파와 보스 중심으로 당을 운영하는 방식을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도저히 국민정당이라고는 할 수 없는 우리 정당들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다.

독일 헌법 소책자. / 장시정 대표 블로그
연방정치교육센터에서 무료로 배포하는 독일 헌법(연방 기본법) 소책자. / 장시정 대표 블로그

우리 정당들은 비일비재하게 당명을 바꾸고 당을 쪼개고 합치고, 파행, 밀실 공천을 해댄다. 이건 우리 정당들이 진정한 의미의 국민 정당이 아니라 한두 사람 또는 일부 권력자의 손에서 놀아나는 사당임을 말해 준다. 그렇기에 수백만, 수천만 유권자들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소수의 정당 권력자에 의한 한국 정치의 지배 현상이 일어난다. 이런 터무니없이 후진적인 정당들 부터 수술해야 하며 그 중 시급한 중심 과제는 당내 민주화와 젊은 정치 인재들을 흡수할 수 있는 정치인 충원 제도의 확립이라 하겠다.

2차 대전후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며 일약 슈퍼스타로 떠오른 독일을 떠받치는 것들로 연방제, 합의제 정치, 법치주의, 사회적 시장경제, 미텔슈탄트, 듀얼시스템 같은 것들을 꼽는다. 그리고 이러한 시스템들은 민주 사회에서 소임을 다하는 시민들에 의해 잘 작동되고 있다.

바로 2016. 6월 가우크Joachim Gauck 대통령이 연임 포기 연설에서 말한 “잘 작동하는 제도funktionierende Institution”와 “참여적 시민들engagierte Buerger”이다. 보수가 참패한 이번 선거를 계기로 국민정당과 정치 참여적인 민주시민들을 육성하자는 시급한 과제를 던져본다. 이제 잠깐이면 또 대선이다.

[출처] 정치가 바로 국력이다|작성자 히든챔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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