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대로(한국어인공지능학회 회장)

1443년에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다면 450여 년이 지난 개화기 1890년대에 주시경은 한글을 널리 쓸 수 있는 길을 닦았다. 주시경은 황무지에서 우리 국어문법을 개척한 국어학자이며, 우리 말글이 무엇인지 젊은이들을 깨우친 국어 교육자이며, 우리 한말글이 살아야 우리 겨레가 산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말 독립운동을 한 국어독립 운동가이다. 개화기에 한말글을 사랑하고 실천한 분들이 여럿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뜨겁게 한글을 사랑하고 실천한 위대한 한겨레였다. 39살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한 일은 엄청나고 그 뜻이 매우 크고 많다. 짧고 굴게 산 위대한 삶이었다.

주시경 이전에 훈민정음을 연구한 이들이 여럿 있었다. 16세기에 최세진이 한자 학습서인 ‘훈몽자회’를 냈고, 18세기에 신경준이 ‘운해훈민정음’을 냈으며, 그 뒤 유희가 훈민정음을 깊이 연구한 ‘언문지’를 냈는데 이 모두 한자음을 적으려는 한자 학습서였다. 우리 글자인 훈민정음으로 우리 말글살이를 하려고 연구하고 우리 말글 독립을 이루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주시경은 우리 말글로 말글살이를 해야 옳다고 생각하고 오로지 우리 말글로 말글살이를 할 수 있는 길을 닦고 열었다. 세종대왕 다음으로 한말글 독립 큰 별이었다.

주시경(주상호)은 1897년 4월 22일 독립신문 제47호에 한글전용을 주장한 논설을 썼다.
주시경(주상호)은 1897년 4월 22일 독립신문 제47호에 한글전용을 주장한 논설을 썼다.

주시경은 1876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문 공부를 했다. 그리고 1894년 19살에 서양 기독교인들이 세운 배재학당에 들어가서 신식 공부를 했다. 1895년 인천관립이운학교 생도로 선발되어, 1896년 2월에 속성과를 졸업하고 다시 배재학당 만국지지역사특별과에 들어가서 공부할 때에 헐버트가 한글로 쓴 세계 사회지리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읽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를 마친 뒤 1900년에 배재학당 보통과에 진학하여 영어를 전공했는데 외국어 문법 실력을 쌓아 우리말본을 잘 만들려는 뜻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주시경이 배재학당 만국지지특별과에 강사였던 서재필을 만나 독립신문사 조필로 일하면서 독립신문사 안에 국문동식회를 만들고 한글맞춤법을 연구했고, 1897년 독립신문에 ‘국문론’이란 논설을 썼는데 "세계 모든 나라들이 제 나라말을 제 나라 글자로 적어 편리한 말글살이를 하고 있다. 한자는 일생을 배워도 다 배우기 어렵고 쓰기가 어렵다. 그러나 한글은 세계 으뜸가는 우리 글자로서 배우기 쉽고 쓰기 쉽다. 오늘날 우리 한 시간은 다른 나라의 하루와 같이 시간이 중요하고 빨리 우리 말글로 힘을 키울 때이다. 이제 한문은 폐지하고 한글만으로 글을 쓰자"고 외쳤다.

오늘날 국립대학 국문과 교수란 자, 정치인과 공무원 언론인들도 일본 한자말을 일본처럼 한자로 써야 한다고 떠드는데 이 분은 한문시대에 우리 말글이 살고 겨레가 독립한 길을 알려주었다. 22살 학생이 쓴 국문론은 오늘날 국어학자가 봐도 흠잡을 게 없다. 참으로 큰 깨달음이고 외침이었다. 그는 학생 때 학비를 벌려고 헐버트 책임자로 있던 삼문출판사에서 사환으로 일을 했는데 그 때 한글의 훌륭함을 알고 한글로 ‘사민필지’란 교과서를 쓰고 미국에서 대학을 나와 문법과 여러 나라 외국말을 아는 헐버트로부터 많은 것을 묻고 배웠을 것으로 보인다. 독립신문사 안에 국문동식회(한글맞춤법연구모임)까지 만든 그였기 때문이다.

그는 서재필이 주도해 만든 독립신문 조필로 일하면서 배재학당 학생모임인 협성회에서 친구 이승만과 함께 애국운동도 하고 회보도 한글로 만들었다. 그리고 상동교회 청년학원에서 한글을 가르치면서 제자들을 키웠고 1907년에는 지석영, 이능화들과 함께 학부 안에 만든 국문연구소에서 위원으로 국문맞춤법을 연구하고 국문연구안이 나왔다. 그러나 우리말을 한글로 적는 말글살이를 위해서 1908년에 그가 한글을 가르친 제자들과 함께 세계 최초 언어학회인 ‘국어연구학회’를 만들었다. 이 학회는 일제 때 조선어학회로 또 대한민국에서 한글학회로 이름이 바뀌어 그가 이루지 못한 꿈을 실천하고 있다.

주시경이 1906년에 지은 대한국어문법과 1914년에 쓴 ‘말의소리’ 찍그림(독립기념관자료)
주시경이 1906년에 지은 대한국어문법과 1914년에 쓴 ‘말의소리’ 찍그림(독립기념관자료)

그 때 국어연구학회는 주시경이 가르친 제자들을 중심으로 만든 모임이지만 회장은 김정진이었다. 아마 주시경은 젊기에 사회 영향력이 있는 나이 든 분을 모신 것으로 보인다. 이 학회는 일본이나 중국, 미국보다도 먼저 만든 언어학회라고 하는 데 그것은 그 때 우리나라 사정이 국어를 연구하고 우리 국어로 말글살이를 하는 것이 절실했기 때문에, 또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제 글자를 안 쓰고 배우고 쓰기 힘든 중국 글자를 쓰는 것은 잘못이기에, 또 정부만 믿을 수 없기에 백성이 일어나니 그렇게 세계 최초 학회가 태어나게 되었다.

주시경은 1890년 15세에 국문을 처음 배워 토 '과·와'의 구별을 깨닫고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7세에 한문과 영어를 배우면서 어려운 한문 대신 국문을 쓰고, 알파벳을 국문에 적용해서 자모음을 풀었으며 모음이 분합(分合)됨을 알았고 아래아(이미지)가 'ㅣ'와 'ㅡ'의 합음(合音)일 것이라고 깨달았다. 1893년 〈국어문법〉을 저술하기 시작했고 1894년 배재학당에 들어가 외국 문법을 배우면서 1897년 독립신문에 〈국문론〉을 발표했다. 그리고 배재학당 보통과에서 영어를 공부하면서 다른 나라 문법을 연구하고 기초를 닦은 뒤 〈대한국어문법〉·〈국어문전음학〉·〈국어문법〉·〈말의 소리〉 등을 냈다. 그리고 최초 우리말 사전인 말모이를 만들다가 이 세상을 뜬다.

그는 교육자로서 상동청년학원, 공옥학교, 서우, 이화, 명신, 흥화, 기호, 숙명, 진명, 보성, 중앙, 융희, 배재, 경신, 영창, 사립사범강습소, 서북협성, 재령 나무리강습소 들이었다. 이렇게 많은 곳에 한글책 보따리를 들고 바쁘게 다니니 학생들이 주보따리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 때 제대로 먹지도 못하며 애쓰는 주시경을 안타깝게 생각한 경상도 분이 내수동에 집을 한 채 사주기도 했으나 일제 감시가 심하니 중국으로 망명하기로 결심하고 그 준비를 하던 중 1914 여름에 급체로 병원에 가서 이틀 만에 이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안타깝다. 그러나 우리 모두 그 뜻을 알고 받들어 살릴 때 그 고마움을 갚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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