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동아일보 김남준 차장
한국편집기자협회 선정
‘2019한국편집상’ 대상 수상

동아일보 김남준 차장.
동아일보 김남준 차장.

점자책을 더듬어본 적 있나요. 시각장애인을 위해 손으로 감지해 읽을 수 있도록 만든 점자책 말입니다. 혹시 점자신문을 본 적은 있나요. 점자책을 만져본 적은 있지만 점자신문이 있다는 말은 저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일간지 편집기자입니다. 편집기자는 신문 지면을 만듭니다. 뉴스가치를 판단해 기사와 사진을 지면에 적절한 크기로 배치하고 제목을 뽑아냅니다. 독자에게 생생한 전달 효과를 높이기 위해 때론 그래픽 이미지를 활용하기도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년여 전인 2018년 11월 18일 그날도 전 신문 편집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날은 좀 특별한 실험을 했습니다. 제목을 여느 때와는 달리 점자 형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점자의 입체 요철을 신문 인쇄로 실현시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왜 점자 모양의 헤드라인을 지면에 만들어 실은 걸까요. 편집기자로서 왜 그런 실험을 했는지, 그 실험이 저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그날 제가 편집을 맡은 기사는 감동적인 인물 스토리였습니다. 전국에서 가장 늦게까지 수능을 치른 시청각장애인 학생 김하선 양의 고충과 환희와 소망을 독자에게 전달해야 하는 기사였습니다. 그런데 자칫 뻔하거나 신파조의 얘기가 될 수도 있어 처음엔 어떻게 편집해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았습니다. 사진부 선배가 찍어온 사진 중에 하선 양이 점자 교재를 손가락으로 읽고 있는 컷이 있었습니다.

유심히 들여다봤습니다. 손가락으로 점자 시험지를 더듬는 건 어떤 느낌일까. 그렇게 손끝으로 점자를 하나하나 해독해 가며 수능시험을 치른다면 얼마나 큰 수고를 들여야 하는 걸까. 밤 10시까지 13시간에 걸쳐 ‘점자 수능시험’을 다 마쳤을 때엔 어느 정도의 성취감과 탈진을 맞닥뜨리게 되는 걸까. 제가 느낀 그 궁금함과 막막함을 독자와 함께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이 아닌 독자들은 18세 김하선 양이 감당하는 실존적 조건과 인고의 도전을 간접적으로라도 겪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럴 때 장애인을 다룬 기사는 비로소 그 본령을 가까스로 수행하는 것 아닐까요.

김남준 동아일보 편집부 차장의 '2019 한국편집기자대상' 수상작.(사진=동아일보)
‘2019 한국편집상’ 대상을 수상한 김남준 동아일보 편집부 차장의 작품.(사진=동아일보)

독자로 하여금 하선 양의 도전을 점자로 더듬어보게 해 보자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사진을 일단 과감하게 트리밍했습니다. 상반신과 얼굴까지 다 나온 사진이었는데 점자책을 더듬는 손만 남겨놓고 잘라냈습니다. 그리고 제목을 뽑아내려 하선 양에게 ‘빙의’해 봤습니다. 하선 양이 느꼈을 피로와 희열을 생생히 전달하는 구어체 제목을 생각했습니다.

취재기자에게 ‘밤 10시 수능 끝! 271쪽 점자 문제 다 풀었다’라는 헤드라인을 점자로 표현하면 어떻게 나오는지 알아봐 달라고 주문했습니다. 하선 양에게 점자를 가르친 부모님께 연락해 결국 점자 형식의 문장을 받은 후 디자인팀에 제작을 의뢰함으로써 신문 지면 위에 ‘입체 같은 입체 아닌 점자’를 구현할 수 있었습니다. 신문에 점자가 마치 오톨도톨한 듯 인쇄돼 나왔을 때 나도 모르게 그 점자로 손이 갔습니다. 눈을 감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사진 속 점자책을 더듬는 하선 양의 손가락들처럼 내 손가락들로 지면 위 점자를 더듬어 봤습니다.

그리고 하나, 고백하듯 밝히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만약 제가 몇 해 전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대성당>을 읽지 않았다면 이날 ‘점자 편집’할 생각을 했을까요.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설엔 서먹했던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대성당을 그림으로써 하나가 되는 ‘굉장한’ 장면이 나옵니다. 시각장애인의 제안으로 펜을 잡은 비장애인은 처음엔 성당을 보며 그립니다. 움직이는 그 손 위에 시각장애인이 자신의 손을 포갭니다. 그러고는 펜을 쥔 비장애인에게 그대로 눈을 감고 그려보라고 합니다. 하나의 손이 돼 역지사지 ‘체인징’한 두 사람. 유체이탈과 상호빙의의 경지에서 공감의 마법을 겪습니다. 소설은 비장애인의 한 마디로 끝납니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지면 구상을 할 때 소설 속 이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접점을 찾기 위해 소설이 시각(그림)을 촉각(손 포갬)으로 치환했다면, 전 그걸 패러디해 촉각(점자)을 시각(비주얼 그래픽)으로 변환했다고 할까요. 소설처럼 저 역시 새로운 소통 가능성을 모색해 봤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점자를 놓고 싶었습니다, 더듬어 접점이 되도록. 그렇게 그날 전 ‘점자신문’을 꿈꿔 봤습니다. 시각장애인들도 읽을 수 있는 점자신문을 그려 봤습니다. 언젠가는 현실화될 수 있을 것도 같은 점자신문, 언젠가는 그렇게 되어야 마땅할 점자신문을 소망해 봤습니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그리고 1년 뒤 11월 6일 저는 과분하게도 한국편집기자협회가 주는 큰 상을 받았습니다. 몸에 맞지 않는 너무 큰 옷을 입은 기분입니다. 이 상은 저한테 과분할 뿐만 아니라 참 난감한 상입니다. 신문에 점자 편집 한번 했다고, 독자가 시각장애인을 대하는 시각을 바꿔놓았다거나 장애인과의 새로운 소통의 장을 넓힌 것도 아닐 겁니다. 저 자신으로 범위를 좁혀 봐도, 시각장애인의 처지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고 할 수도 없다는 걸 잘 압니다. 따라서 이 상은 저에게 그 문제에 대한 더 큰 관심과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죽비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시청각복합장애를 가진 김하선 양이 수능을 치른 기사를 읽어보다가 가장 마음 아팠던 것은 공부할 점자교재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현실이었습니다. EBS 교재도 점자화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 기다리다 못한 부모님이 직접 일반교재를 보며 점자화하는 수고를 들여야 하는 상황이 좀 어이없기까지 했습니다. 한국편집기자협회와 회원사 동료 편집기자들이 이 상을 뽑아주신 의미는, 언론이 이런 현실을 더 적극적으로 다루고 더 돋보이게 편집해 문제의식을 널리 환기시키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장애인들이 설계한 세상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분들의 고충에 대해 더 많은 고민을 하는 계기로 삼으려 합니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쓴 장애인 변호사 김원영 씨가 한 말 중에 '슈퍼 장애인'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장애인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환경에서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아내기 위해 '슈퍼 장애인'이 돼야겠다고 결심하는 대목이 씁쓸하고 가슴 아팠습니다. 슈퍼 장애인이 아닌 보통 장애인이라도 보통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일 것입니다. 그런 사회로 한발씩 나아가기 위해서 언론이 할 일과 편집의 역할에 대해 성찰하라는 메시지로 이 상의 의미를 받아들일까 합니다.

그런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점자책이 넘쳐날 것입니다. 어쩌면 점자신문도 시각장애인의 집으로 배달될 것입니다. 점자가 '非점자'만큼 흔해지는 세상, 잠시 눈을 감고 꿈꿔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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