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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범구 대사관 이야기(19)] 떠나야 할 때를 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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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범구 대사관 이야기(19)] 떠나야 할 때를 안다는 것
  • 정범구 대사
  • 승인 2019.11.16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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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글쓰기’ 신문은 주독일대한민국대사관 정범구 대사의 ‘대사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정 대사는 대사관 주변 이야기와 한독 관계 등을 사회관계망서비스 ‘페이스북’에 올리고 있습니다. 정확하고 간결하고 논리적인 문장으로, 외교관의 소소한 일상과 깊이 있는 사색, 강대국들과의 이해관계를 담고 있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글쓰기’의 모범사례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특히 다양한 현장 사진을 곁들여 국민들에게 외교관이 일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범구 대사는 충북 음성 출신으로 16대, 18대 국회의원을 거쳐 지난해 1월 독일 대사로 부임했습니다.

 

* 바야흐로 이별의 계절이다. 잎은 나무를 떠나고, 동면을 앞둔 짐승들은 바깥 세계와의 결별을 준비한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에 가을은 깊어 이제 "너도 가고 나도 가야"하는 계절이 오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 들려오는 이별 소식은 그래서 더욱 마음을 스산하게 한다.

* "더 이상 쓸모없어 졌다면 차라리 떠나는게 낫겠지(Wenn man nicht mehr recht gebraucht wird, dann soll man besser gehen)"

[대사관 이야기 83]에서 언급한 "작은 거인" 가브리엘 전 외무장관. 그가 정계 은퇴를 밝히며 언론을 향해 한 말이다. 2022년까지 임기가 보장된 연방의원 직도 11월 1일부로 사퇴한다.

독일과 한국이 가장 다른 점이 무어냐고 그가 물었다

지난 9월 그가 사는 곳으로 방문했을 때 그는 내게 연방의원직을 내놓고 정치를 떠날 생각이라고 귀띔해 줬다. 그때 물어보고 싶은게 많았지만 아직 공식화되기 전이라 참았다. 이제 베를린 의회에 출석할 날도 며칠 남지 않아서 그를 점심이나 같이 하자고 관저로 초대했다. 바바리 코트에 가방 하나를 메고 걸어들어 오는 그의 모습이 가을 찬 바람처럼 소슬해 보인다. 한 때 독일정치를 주름잡고,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던 자신만만하고 야심찼던 그의 모습이 아스라하다.

* 지난해 1월, 내가 독일대사로 부임할 당시 그는 독일 외교장관이었다. 그 전에 그는 이미 40대 초반에 니더작센 주 총리를 지냈고, 환경부, 산업부 장관을 지냈다. 독일의 대표정당인 사민당(SPD) 대표도 오래 역임했다. 지금 당 대표가 공석으로 혼란 상태에 있는 SPD 일각에서는 그가 구원투수로 등장하는 것 아니냐는 바람도 있었지만 결국 그가 설 땅은 없었던 것 같다.
왜 정치를 떠나기로 했냐는 내 질문에 돌아 온 그의 대답은 소박했다.

얼마 전 60회 생일을 맞으면서 자신을 돌아봤다고 한다. 지방의회부터 시작해 30년간 정치에 몸 담았는데, 이제 앞으로 자신에게 남겨진 20여년 세월을 지금과는 다르게 살아보고 싶었다고 했다. 생일 즈음에 어린 딸들과 자전거를 타면서 새삼 그런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하버드와 독일 본 대학에서의 강의와, 자신이 편집인으로 관여하게 된 몇몇 매체에 기고하는 등, 지적인 활동도 풍부하게 하고 싶다고도 했다. 가족에 관한 소회도 밝혔지만 개인적인 이야기라 이곳에 옮기지는 않는다.

* 포털 뉴스에서 보니 나이 들수록 몸에서 냄새 (노인 냄새)가 나는 것은 몸 속 노폐물이 잘 빠지지 않아서라고 한다. 잘 빠지지 않는다면 쟁여 넣는 것이라도 줄여야 할 것 같다. 박경리 선생 생전 말씀처럼 "버리고 갈 것만 남아 홀가분"한 상태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브리엘도 이제 동면을 위해 잎을 떨구는 나무의 지혜를 습득해 가고 있는 것일까?

오늘도 여전히 시끄럽고 어지러운 국내외 소식들을 접하면서, 늦가을 오후 속으로 사라져 간 가브리엘 장관의 잔영이 오래토록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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