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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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끝 무렵 19세기에 기독교가 중국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들어왔지만 한문으로 된 성경이 아니고 한글로 성경을 만들어 포교했다. 서양 선교사들은 우리나라에 유럽이 쓰는 로마자와 같은 소리글자가 있고 우리나라말이 중국말과 다른 것을 알고 성경을 우리 말글로 알리면서 기독교도 더 빨리 알려지고 한글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한글이 태어나고 300여 년 동안 일부 왕실과 양반집 아녀자와 선비들 사이에서 조금 쓰였는데 1882년 중국에 온 로스목사가 심양에서 성경을 한글로 쓰고 선교하기 시작했고, 1885년 부활절 날 조선에 온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도 성경 국역에 힘쓰면서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한글로 교육하니 한글이 널리 알려지고 쓰이게 된 것이다.

기독교는 유교와 불교가 배우고 쓰기 힘든 한문으로 된 중국 경전을 그대로 읽고 쓰는 것과 달랐다. 한글은 배우고 쓰기가 쉽고 우리말로 쓴 것이니 서민들도 쉽게 읽을 수 있어서 기독교는 빨리 퍼지고 그 덕에 한글도 일반인들 속에서 살아난 것이다. 기독교도 좋고 한글도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유교와 불교인들은 한글세상이 다 된 20세기 대한민국 때에도 한문을 고집하는 것을 넘어 한글만 쓰기를 반대했다. 이들은 어리석고 바보처럼 굴었다. 요즘 들어서 그 잘못을 깨닫고 유교도 사서삼경을 국역하고 불교도 쉬운 말로 찬불가를 지어 부르고 불경도 국역해 쓰기 시작했다. 이제 大雄殿이란 집 이름도 ‘큰법당’이라고 한글로 쓰는 곳도 있다.

왼쪽부터 1858년 중국에서 나온 한문 성경과 1882년 중국에서 로스 목사가 만든 한글 성경.
왼쪽부터 1858년 중국에서 나온 한문 성경과 1882년 중국에서 로스 목사가 만든 한글 성경.

한글은 세종대왕이 1443년에 만든 뒤 3년 동안 그 쓰임새를 실험하고 연구한 다음 1446년에 훈민정음해례본을 완성하면서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세종대왕은 1446년에 소헌왕후가 죽자 그 아들 수양대군에게 석가모니 일대기인 석보상절을 짓게 했고, 그 다음해인 1447년에 월인석보를 기초로 직접 악장을 만들어 월인천강지곡이란 불교찬가를 한글로 지었으며 그 뒤 세조가 월인석보도 지었다. 성스러운 조선왕조 이야기인 용비어천가와 함께 불교 이야기를 새 글자인 한글로 쓴 것이다. 불교와 한글은 이렇게 남다른 인연이 있다. 그러나 그 때 유교 선비들이 한글 태어나는 것까지 반대했기에 유교 이야기는 한글로 쓰지 않았다.

이렇게 세종대왕은 불교를 믿고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불교는 그 뒤 한글을 거들떠보지 않고 중국 불경을 그대로 읽고 외웠다. 그러나 기독교는 300년 뒤에 들어왔어도 한글로 경전을 만들어 선교한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신식 학교도 세우고 한글로 교육을 했다. 또한 고종 때인 1886년 우리나라 최초 신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을 세웠을 때에 교사로 온 미국인 헐버트는 한글을 3년 만에 한글을 깨우치고 1889년에 한글로 ‘사민필지’란 사회지리교과서를 지었다. 그리고 1991년에 글묶(책)을 출판했다. 외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처음 한글로 교과서를 만들었고, 한글과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이 훌륭함을 영어로 써서 외국에 알렸다.

오른쪽부터 세종대왕이 한글로 쓴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 세조가 한글로 쓴 석보상절.
오른쪽부터 세종대왕이 한글로 쓴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 세조가 한글로 쓴 석보상절.

그리고 기독교 선교사로 온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언더우드는 연희전문학교, 메리 스크랜튼은 이화학당 같은 기독교 재단 교육기관을 만들고 거기서 한글로 가르치고 포교했다. 그 때 한문을 배우다가 나이 들어서 배재학당에 들어간 주시경은 그곳에서 한글과 영어, 서양문물을 배우면서 학생신분으로 서재필과 헐버트를 도와 독립신문 만드는 일도 거들고, 그 신문사 안에 국문동식회(한글맞춤법연구회)도 만들어 한글 연구를 하고 한글전문가가 되었다. 그리고 상동교회와 여러 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쳤으며, 1908년에 그 제자들을 중심으로 국어연구학회(오늘날 한글학회)도 만들었다. 기독교 재단 학교가 한글을 살리고 키운 것이다.

기독교는 1800년대 이 땅에 들어올 때만 한글로 성경을 만들어 한글을 널리 편 것만 아니라 그 뒤 100년이 넘게 한글과 함께 살았다. 한글을 살린 주시경도 배재학당 (아펜젤러 세움)에 공부하며 한글학자가 되었고, 연세대(선교사 언더우드가 세움)는 ‘연세춘추’란 학교 신문을 1950년대부터 한글 전용으로 만들었고, 이화여대(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세움) 신문인 ‘이화학보’는 1970년대부터 한글로 만들었다. 연세대 최현배, 김윤경 교수는 한글만 쓰기를 주장하고 실천했다. 기독교 재단 학교가 신문이 한글로 가로쓰도록 이끌었고 한글나라를 만드는데 크게 이바지한 것이다. 그러나 일제 때 경성제국대학 후신인 서울대와 유교 재단인 성균관대 신문은 지금도 제호가 한자로 쓰고 있으며 이들은 지금도 한글로만 교과서 만드는 것을 반대하고 일본 한자말을 일본처럼 한자로 쓰자고 주장한다.

왼쪽은 1950대부터 한글로 만든 연세대 학보이고 오른쪽 아직도 제호를 한자로 쓰는 서울대학 신문.
왼쪽은 1950대부터 한글로 만든 연세대 학보이고 오른쪽 아직도 제호를 한자로 쓰는 서울대학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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