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의 역사적 혜안과 미래에 대한 판단력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문신의 나라’ 조선과 ‘칼의 나라’ 일본의 국운을 가른 1543년 조총사건
청나라 속국, 일본에 먹혀... 준비하고 실력 쌓지 않은 ‘역사의 보복’
경제는 먹고사는 문제, 안보는 죽고 사는 문제
류성룡의 징비(懲毖)정신
류성룡-이순신의 재조산하, 재조지은

10. 재조산하(再造山河)

지도자의 역사적 혜안과 미래에 대한 판단력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피와 땀의 결정체인 징비록
피와 땀의 결정체인 징비록

재조산하(再造山河)란? 나라를 다시 만든다는 뜻이다. 흔히들 임진-정유왜란(1592~1598)이 끝난 뒤에 조선은 200년 역사의 막을 내리고 새로운 나라가 들어섰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새로운 나라가 들어섰더라면, 한반도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역사에 가정(Historical If)은 없다지만 주자학을 버리고 최소한 실용적인 양명학을 받아들여 실용주의 노선을 걸었다면? 또 일본과의 교역으로 서양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방책을 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하여 부국강병의 나라가 됐을 수도 있다는 가설이다. 그러나 1인 전제국가에서 오로지 왕의 혜안과 판단에 의해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는 상황에서 조선의 백성들은 박복(薄福)했다.

‘문신의 나라’ 조선과 ‘칼의 나라’ 일본의 국운을 가른 1543년 조총사건

1543년 일본 규슈 남단 사쓰마번(가고시마현) 다네가시마(種子島) 도주 도키타가(時堯)는 표류 중 정박한 배에 타고 있던 포루투갈 상인으로부터 조총 2자루를 구입했다. 이내 대장장이에게 명하여 그 총을 분해, 역설계한 후 대량생산 체제에 돌입했다. 열다섯 살짜리 도주 도키타가(時堯)는 당시 주요무기였던 칼, 활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화승총인 조총에 대해 끓어오르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했다. 조총은 일본열도에서 벌어진 100년 전투의 판도를 획기적으로 바꾼 게임 체인저(game changer)가 됐다. 도키타카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즉시 보고했고 노부나가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총으로 전국을 통일했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다네가시마 박물관에 전시중인 조총.
다네가시마 박물관에 전시중인 조총.

조선은 그해 풍기군수 주세붕이 영주에 백운동서원(후에 소수서원)을 열었다. 조선은 명나라에서조차 쇠퇴한 주자학의 신봉자임을 자처하며 소중화(小中華)주의에 흠뻑 빠져있었다. 동북아 판도를 바꿔놓은 조총이 조선에도 전래되었다. 1554년 명종 때와 1589년 선조 때 일본인이 조총을 갖다 바쳤는데 “글씨도 모르는 왜인들이 들고온 게 무엇인고?”하는 무관심으로 무용지물 취급당했다. 선조는 조총 두 자루를 군기시 창고에 넣으라고 명했다. 그리고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부산포에 상륙한 일본군 조총부대의 우레에 같은 총성에 조선군은 혼비백산,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조총을 사격중인 일본군 조총부대.
조총을 사격중인 일본군 조총부대.

조총 한 자루가 이렇게 나라의 안위와 운명을 송두리째 바꿨다. 조선은 오로지 어버이의 나라인 명나라만을 바라보며 친명사대에 골몰했고 일본과 여진(후금, 청)의 움직임에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이렇듯 외교 국방정책에서 헛발질을 함으로써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침략(왜란, 호란)을 받아 나라는 콩가루가 됐다. 지도자의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인식, 판단력 부족이 나라의 존망에 관계되는 참화로 이어졌다.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군 이래 가장 참혹한 장기전인 임진-정유재란의 참화에서 보고 배우고 느낀 바가 없었으므로 나라는 당파의 당리당략으로 기득권의 배를 불리는데 급급했다. 뼛속까지 친명사대주의자인 선조, 쇠잔해가는 명나라와 여진족(후금)의 발흥 속에서 줄타기 외교를 펼쳤던 광해군, 광해군의 폭정(폐모살제)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와 서인세력의 친명배청(親明排淸) 정책으로 나라를 외침을 불러일으켰고 백성들은 곤죽이 되고 말았다.

청나라 속국, 일본에 먹혀... 준비하고 실력 쌓지 않은 ‘역사의 보복’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후 조선은 250여 년 동안 청나라의 속국으로 공물의 강요, 처녀의 공납 등 온갖 굴종을 감수해야 했다. 1894~1895년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해방군’으로서 조선을 다시 그들의 손아귀에 넣었다. 그리고 한일합병 36년을 지나 독립이 되었지만 극렬한 좌우 대립과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으로 한반도는 두 동강이 났다. “조선인은 무능하고 분열하는 민족이다.”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지금까지 남과 북은 각기 다른 사상과 이념(자유주의와 공산사회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DMZ와 NLL으로 분단되어 있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세계 최대 열강인 중국, 러시아, 일본 및 미국 등에 둘러싸여 ‘외로운 섬’의 형세이다. 대한민국의 외교, 안보, 국방, 경제문제는 늘 항존하는 4대 열강의 변수와 북한의 핵 도발 위협 속에서 저울질해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에서 현대사에서 민족중흥의 기치를 내건 몇몇 선각자들의 부국강병책으로 단군 이래 중국의 코를 납작 눌러, 가까스로 세계 경제 10위권 진입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그러면 뭐하나. 창업(創業)보다 수성(守成)이 힘들다고 했다. 지금 대한민국호(號)는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내우외환의 참화가 진행중이다. 정치 지도자들의 외교, 안보국방에 관한 인식 부족과 판단력 결핍으로 국력이 나날이 쇠잔해가고 있다. 그저 올망졸망하고 고만고만한 자들이 찧고 까불며 나라를 경영하다 보니, 안보와 경제는 시계 제로의 안개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다. 이미 세계사적 실험에서 망한 결과로 판명된 레닌의 공산, 사회주의 체제를 부활시켜, 옹호하고 그리워하는 철 지난 사이비 사상이 종횡무진하는 이상한 판이 벌어지고 있다.

국민들 또한 역사 공부를 등한시함으로써 역사에서 교훈을 찾으려는 이성적 로고스(판단력)를 상실한 채 막연한 감성팔이 파토스적 접근법으로 현실문제를 풀려니 오답 투성이가 나오는 것이다.

나라를 분열시킨 조국사태의 장본인 조국 국회청문회.
나라를 분열시킨 조국사태의 장본인 조국 국회청문회.

급기야 입만 열면 정의를 외쳐왔던 조국이란 자와 그 가족이 벌인 희대의 위선과 비리, 문서 위조라는 막장 드라마에 대해서도 국민들은 갈라졌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참과 거짓은 과연 어떤 것인지에 눈을 감고 좌우 진영논리에 함몰되어 있는 형국이다. 이성의 마비가 가져오는 폐해가 자기 발등에 떨어지지 않는 한, 먼 산구경하는 꼴이다. 북한이 아침마다 ‘굿모닝! 미사일’을 쏘아대도 꿈쩍하지 않는 이성마비가 급기야 부를 참화는 과연 무엇일까.

경제는 먹고사는 문제, 안보는 죽고 사는 문제

경제는 먹고사는 문제이고, 안보는 죽고 사는 문제이다.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은 외교안보, 경제에 있어서 자국 이기주의에 골몰하고 있다. 우리는 지도력의 상실로 국민 분열이 가중돼 나라의 파이조각이 점점 줄어드는 다운사이징 증후군을 앓고 있다. 힘이 없으면 동맹이라도 잘해서 외교안보를 유지 강화해 나가야 하는데, 헛발질 투성이다. 결국 사람이 중요한데, 실력을 가진 전력가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답답무지로소이다’다. 아마추어 오합지졸이 ‘설마’를 외치며 하루하루 시간보내기에 급급하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영영 없어보인다. 그래도 60, 70년대는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국민통합의 의지로 나라의 경제 기틀을 세웠고 단군 이래 최대 민족 중흥의 역사가 만들어졌다.

해방 이후 근대화와 민주화, 정보화에서 세계의 부러움을 사던 나라는 언제부터인가 변방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북한 공산군의 남침 방어전에서 같이 피를 흘렸던 미국과의 혈맹관계는 느슨해졌고 일본과의 군사정보교환 체제인 지소미아가 파기되었다. 한미일 외교국방 고리가 풀어지는 자해행위를 즐거워할 자들이 누구인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조국 사태로 기울어진 운동장에 선 청년들은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라는 말에 치를 떨며 절망하고 있다. 기득권의 범주에 못들어간 이들은 개, 돼지로 폄하되었다. 친구끼리도 생각의 차이로 등을 지는 절교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역사는 이런 비정상적인 사실을 낱낱이 기록할 것이고 훗날 엄정한 평가가 나올 것이다.

7년 전쟁 참회록, 징비록.
7년 전쟁 참회록, 징비록.

최근에 서점가에는 징비록 관련 책이 판매순위 상위에 랭크되어 있다고 한다. 필자의 졸저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은 절판되어 더 이상 선을 보이지 못하고 있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어떤 분야든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특히 정치 지도자가 되려는 자는 징비록을 꼭 읽어보길 바란다. 징비의 정신이란 과연 무엇인가.

류성룡의 징비(懲毖)정신

임진왜란이 터진 다음해인 1593년 6월 28일 진주성 2차 공방전 중에 일본 제1군의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강화교섭 차 명나라 사신 사용재(謝用梓), 서일관(徐一貫)과 함께 일본 규슈 나고야성(名護屋城)으로 떠났다. 그곳에 머물며 전쟁을 진두지휘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명나라 사신에게 화건 7조(和件 7條)를 제시했다. 그 중 ‘조선 8도 가운데 북4도는 명나라가 관할하고 한성은 조선에게 돌려주고 남4도(경기, 충청, 전라, 경상)는 일본에 할양한다.’는 조항이 들어있었다.

당시 명나라는 황제 신종(神宗)의 무능, 환관의 전횡, 이민족의 발호 등으로 재정이 고갈 상태에 빠져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 따라서 이 전쟁을 빨리 끝내고자 했는데 조선 북쪽 땅을 요동방어의 울타리로 삼는 번리지전(藩籬之戰)으로 처리할 심산이었다. 일본은 전쟁을 확대하지 않고 조선 남부 4도를 할양받아 조선 지배를 확실하게 보장받는 것이었다. 수만 명의 명군과 군마(軍馬)의 군량조달과 마초 공급에 허리가 휘어질 정도로 진땀을 뺏던 ‘전시재상’ 西厓(서애) 류성룡(柳成龍)은 “우리 강토의 땅은 한 자 한 치도 왜에게 넘겨줄 수 없다.”며 땅을 치며 울부짖었다. 어찌할 수 없는 약소국의 비애(悲哀)였다.

그 이전인 1593년 2월 도원수 권율(權慄)이 행주산성에서 대첩을 이루자 명나라 경략(경략군문 병부시랑) 송응창(宋應昌 1536~1606)은 권율에게 패문을 보내 일본과 싸워 이긴 것을 질책했다. 송응창은 명나라 2차 원군 총사령관으로서 자주 국방권이 없던 조선군을 통합 지휘하고 있었다. 그해 6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참패하고 성내 살아있는 모든 생물은 도륙당했지만, 사신 심유경(沈惟敬)을 일본군 진영으로 보내 오히려 일본군의 만행을 두둔하는 발언을 하게 했을 정도다. 피아(彼我)가 구분되지 않는 이상한 전쟁이었다.

명군의 만행(蠻行) 또한 고려 때 몽고병을 능가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당(唐), 원(元), 명(明), 청(淸) 등 중국이 우리에게 저지른 작태와 횡포를 개략적으로 보더라도 약소국의 비애(悲哀)를 절감할 수 있다. 징비록(懲毖錄)에는 중국 사신 사헌이 류성룡에게 “조선 백성들이 ‘왜놈은 얼레빗, 되놈은 참빗’이라고 한다던데 그게 사실이냐.”고 묻는 대화가 나온다. ‘되놈의 참빗’으로 말하자면 빗살이 굵고 성긴 얼레빗에 비해 대나무 참빗은 무척 가늘고 촘촘하여 한번 빗으면 남는 게 없어 명군의 수탈이 심했다는 이야기다.

명군이 조선 백성들에게 식량약탈은 기본이고 무고한 인명살상(전공을 위한 수급 채취용), 부녀자 겁탈, 토색(討索)질이 다반사였다. 명나라는 조선을 위기에서 구했다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강조하면서 내정간섭은 물론, 사신들은 온갖 뇌물을 요구했다. ‘의주에서 서울에 이르는 수천리에 은과 인삼이 한 줌도 남지 않았고, 조선 전체가 전쟁을 치르는 것 같았다.’고 선조실록은 전하고 있다.

조선의 입장을 대변하던 류성룡이 얼마나 거추장스럽고 미웠는지 1593년 4월 명군 총병 사대수(査大受)는 류성룡의 군관 사평(司評 정6품) 이충이 왜군을 사살했다고 해서 폭행해 중상을 입혔다.

왜군이 2차 침입을 한 1597년 정유재란 때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은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에 따라 수로군(水路軍) 대장으로 1598년 7월 16일 전남 완도의 고금도에 도착하여 이순신(李舜臣)의 수군과 합류했다. 진린의 임무는 조선 3도 수군통제사 이순신과 함께 서로군(西路軍) 대장 유정(劉綎) 제독과 도원수 권율(權慄)의 육군과 연합하여 순천왜성에 웅거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를 사로잡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니시의 끊임없는 뇌물공세로 유정은 한 차례 순천왜성을 공략했다가 실패하자,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다가 퇴각했고 역시 뇌물을 받은 진린도 “퇴각로를 열어주자.”고 하였다가 이순신의 완강함에 마지못해 9월 16일 노량해전 때 조명연합수군 함대를 결성, 참전했다. 이순신 장군은 이때 휘하 장수들에게 편범불반(片帆不返)! 즉 ‘한 척의 일본 배도 되돌아 갈 수 없다.’며 추상(秋霜)같은 호령을 했다.

포학한 성품의 진린을 두고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히고 있다.

‘상(上)이 청파(靑坡)까지 나와서 진린을 전송하였다. 진린의 군사가 수령을 때리고 욕하기를 함부로 하고 노끈으로 찰방 이상규(李尙規)의 목을 매어 끌어서 얼굴에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보고 역관(譯官)을 시켜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나는 같이 있던 재상들에게 ‘안타깝게도 이순신의 군사가 장차 패하겠구나. 진린과 함께 군중(軍中)에 있으면 행동에 견제를 당할 것이고 의견이 서로 맞지 않아 반드시 장수의 권한을 빼앗고 군사들을 학대할 것이다.’

진린이 고금도(완도군)에 내려온 지 3일만에 벌인 절이도(折爾島 고흥군 거금도)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전투를 벌여 왜적의 머리 71급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이 해전에서 진린의 패악한 본색이 나왔다. 이순신이 처음 겪은 진린에 대한 장계가 선조실록 1598년 8월 13일자에 기록되어 있다.

‘멀리서 적선을 바라보고는 원양(遠洋)으로 피해 들어간 진린은 우리 군사들이 참획한 수급(首級)을 보고 그 관하(管下)를 꾸짖어 물리치고 이순신에게 공갈 협박을 가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다. 그래서 이순신이 마지못해 40여급을 나눠 보내주었다. 또 계유격(季遊擊)에게도 5급을 보냈다.’

진린의 명군은 조선 수군에게 행패를 부리고 백성들에게는 약탈을 일삼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이순신 장군은 진린에게 “백성들과 함께 떠나겠다.”며 짐을 꾸렸다. 그러자 진린이 만류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귀국의 군사들이 나를 속국의 장수라 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 그러니 내게 그들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해준다면 서로 보존할 도리가 있지 않겠느냐.”라고 하여 진린의 승낙을 얻어냈다. 이후 명군의 횡포는 잦아들었고 이순신 군영 주변에는 수만 명의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상당한 마을을 형성했다. 이순신의 애민(愛民)정신이 발휘되었기 때문이다.

류성룡(남인)의 피맺힌 절규인 망전필위(忘戰必危)! 즉,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로워진다.’는 외침에도 불구하고 당색이 다른(서인) 중신들은 그의 말을 귓바퀴로 흘러보냈다. 왜란이 끝난 뒤 우리민족 특유의 급망증(急忘症)이 도저 언제 그랬느냐듯이 태평무사하다가 채 30년도 안 돼 북쪽 오랑캐인 여진으로부터 두 차례 침략(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하고 말았다. 이때 끌려간 여성은 50여만 명이었고 남은 백성들은 맞아죽고 굶어죽는 등 곤죽이 됐다. 300년 후 구한말 때 청나라 위안스카이(袁世凱 원세개)의 패악한 행동은 말할 것도 없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류성룡은 북인으로부터 주화오국(主和誤國), 즉 일본과 화해를 주도해서 나라를 망쳤다는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당한 뒤 고향 안동에 내려와 징비록(懲毖錄)을 피와 눈물로써 집필했다.

예기징이비후환(豫其懲而毖後患)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하고

지행병진(知行竝進) 알면 행하여야 하며

즉유비무환(卽有備無患) 그것이 곧 유비무환 정신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당색에 따라 나라의 안위는 물리친 채 당리당략으로 일삼는 정치인들을 보면서 ‘역사는 반복한다.’는 사실에 등골이 오싹할 따름이다. 그리고 한 국가의 존망은 외침보다도 내분과 내란에 의해서 망하고 말았다는 역사적 사실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류성룡은 한양 건천동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이순신의 장재(將才)를 일찍 알아봤고 난세에 가장 ‘위대한 만남’으로 멘토-멘티 인연을 이어갔다. 그의 징비 정신은 이순신의 선공후사(先公後私), 임전무퇴(臨戰無退), 필사즉생(必死則生) 및 백의종군 후 살신성인(殺身成仁)과 그 맥을 같이 한다.

류성룡-이순신의 재조산하, 재조지은

역사에 가정(Historical If)은 있을 수 없지만, 가정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새로운 지혜를 주기도 한다. 이순신 장군이 1598년 노량해전에서 살아남고 7년 전쟁의 온갖 풍상을 몸으로 때운 영의정 류성룡(柳成龍)과 함께 나라를 다시 만들었다면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어떤 상황을 맞이하게 됐을까?

'천년의리' 류성룡과 이순신.
'천년의리' 류성룡과 이순신.

이른바 ‘전략가’ 이순신과 ‘경세가’ 류성룡, 두 영웅이 나라를 다시 만드는 ‘재조산하(再造山河)’를 상상해본다. 전시 재상이었던 류성룡이 주창했던 작미법(作米法 공물 대신 토지결에 따라 쌀로 세금을 냄), 속오군(束伍軍 양반에게도 군역을 주어 천민과 함께 편성한 군대) 제도 및 정병(精兵)을 만들고자 했던 기무10조의 개혁 등은 너무 멋진 개혁 아이디어였다. 특히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나라가 위태로워진다는 망전필위(忘戰必危)는 곧 징비(懲毖)정신의 백미(白眉)로 꼽힌다.

이순신 장군의 평생 멘토였던 영의정 류성룡(柳成龍)은 “이순신은 사람됨이 말과 웃음이 적고 단아한 용모에다 마음을 닦고 삼가는 선비와 같았으며 속에 담력과 용기가 있어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이는 곧 그가 평소에 이러한 바탕을 쌓아온 때문이었다. 이순신은 재주는 있었으나, 운수가 없어서 백가지 경륜 가운데서 한 가지도 뜻대로 베풀지 못하고 죽었다. 아아. 애석한 일이로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許筠) 역시 한양 건천동에 살았는데, “류성룡이 이순신을 등용한 것은 나라를 중흥시킨 큰 공로였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는 이순신의 파직 원인을 류성룡에 대한 반대파(북인)의 공격 때문이라고 보면서 최악의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류성룡이 임진왜란 당시에 실시했던 각종 군사훈련과 전술, 고기잡이와 둔전 활성화 등 경제 방안 등은 이순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류성룡이 낙향, 징비록을 집필한 안동 옥연정사. 지금은 예약 민박집으로 활용되고 있어 아쉽다.
류성룡이 낙향, 징비록을 집필한 안동 옥연정사. 지금은 예약 민박집으로 활용되고 있어 아쉽다.

이순신 장군이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순국하던 날, 류성룡은 파직되었다. 그리고 류성룡은 안동으로 내려와 옥연정사에서 ‘7년 전쟁 참회록’인 징비록을 피와 눈물로써 써내려갔다. 그 징비록이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독자가 거의 없었고(서점조차 없었다), 17~19세기 일본에서 더 많이 읽혔다니 참으로 가슴 답답할 따름이다. 책을 읽은 자와 안 읽은 자의 운명은 극명하게 전혀 다른 결과를 보였다.

조선은 이순신과 류성룡이 이룩한 ‘재조지은(再造之恩)’에 대한 적절한 보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은 죽고도 여전히 살아있다. 끝.

저작권자 © 자연치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