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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특강 27 (단락 표지와 인용문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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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특강 27 (단락 표지와 인용문 표시)
  • 글쓰기신문
  • 승인 2019.11.11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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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단락 표지와 인용문 표시

위에서 단락의 형식과 내용이 일치되지 않는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런데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단락 표지와 인용문에 쓰이는 들여쓰기를 혼동하는 데서 빚어지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이 문제에 관하여 살피기로 한다.

단락 표지와 인용문 표시는 구별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는 다들여쓰기로 표시되고 있기 때문에 형식상으로는 같아 보인다. 그러나 두 가지는 그 기능이 서로 다르다. 이들을 혼동하여 단락 구조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는 수가 있다. 다음에서 밝혀지는 것처럼 양자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보기 8.7]

현관에 올라온 덕기와 만나서 나란히 돌쳐서려니까, 밖에서 자전거를 버티는 소리가 나며 문을 열고,

"서방님!"

하고 부른다. 원삼이다. -- 염상섭, "삼대" 중에서.

위 예문에서는 인용한 대화를 따옴표로 표시하면서 한 칸 들여 쓴 것은 단락의 표지가 아니다. 이런 들여쓰기를 어떤 이는 "인용 단락"의 표시라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낱낱의 대화가 단락을 이룬다고 하는 것은 전혀 사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인용된 대화는 그 자체 독립된 단락일 수가 없다. 위 예문을 다음과 같이 고쳐 써 보면 이 점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보기 8.7']

현관에 올라온 덕기와 만나서 나란히 돌쳐서려니까, 밖에서 자전거를 버티는 소리가 나며 문을 열고, "서방님!" 하고 부른다. 원삼이다.

본디 따옴표를 하는 인용문이나 인용구는 위에서처럼 인용자의 지문에 이어쓰는 것이 관례이므로 인용되는 내용 자체가 한 단락을 이룬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인용 내용이 상당히 긴 경우도 마찬가지로 인용 부분을 한 단락이라 할 수가 없다.

[보기 8.8]

"불나비 사랑"이라는 말이 있듯이, 불나비는 불을 보고는 자기 몸을 태우면서 덤벼든다. 말하자면 불이라는 애인을 항하여 자기몸을 불사르면서 내던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불나비는 미물이면서도 우리의 속물 근성을 비웃는 정열을 가졌다고 하리라. 이상(李箱)은 그의 "권태(倦怠"라는 수필에서 불나비의 이런 속성을 간파하고 있다.

불나비가 달려들어 불을 끈다. 블나비는 죽었든지 화상을 입었으리라. 그러나 불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 알고--펑상에 불을 초조히 찾아 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생물이니 말이다. --이상, "권태" 중에서

위 예문에서 뒷부분에 인용된 이상의 글은 그 자체로서 한 단락을 이룰 만한 내용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어디까지나 앞 본문의 뒷받침을 위한 인용 구절이므로 앞 지문에 첨가되어 단락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인용의 형식 문제와 관련된 문제로서 또 한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그것은 다음 보기에서 보듯이 인용구 뒤의 형식 표지 문제이다. 다음 예문은 문단과 인용문의 차이점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보기 8.9]

오늘 우리 반에서는 "거울"의 공과에 관해서 토론을 벌였다. "거울은 필요악이다"라는 주제를 가지고 의견들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색다른 주장이 나왔다.

먼저 거울은 필요하다는 의견을 가진 학생들이 말문을 열었다.

"자기가 남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거울이 꼭 필요 하지요."

하고 한 학생이 말하자,

"그렇지요, 거울이 없다면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을거예요."

뒷쪽에 앉은 학생이 맞장구를 치고 나왔다. 그러자 다른 한 학생이,

"아마도 그 궁금증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일찍부터 거울을 만들어서 사용했을 것입니다. '나무 거울,' '쇳경'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먼 옛날부터 나무나 쇠를 갈아서 거울을 만들었거든요."

이처럼 거울의 기원론까지 들고 나오면서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이 시점에서 벌써 무용론자의 목소리는 터져 나왔다.

"인간이 자기의 얼굴 모습을 안 순간부터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남보다 잘 난 사람은 자만심, 못난 사람은 좌절감이 생기기 때문이지요." 이런 말이 떨어지자 한 편에서는 박수까지 나왔다. 그 뒤를 이어 무용론자의 열띤 발언이 쏟아졌다.

-- 학생의 글--

위의 보기에서 문단을 표시한 들여쓰기는 첫머리의 "먼저"라는 말로 시작되는 곳과 "이 시점에서"라는 말이 나오는 대목이다. 그밖의 따옴표가 있는 곳의 들여쓰기는 인용문의 표시이다.

위의 보기에서 특별히 유의해야 할 점은 인용문과 거기에 딸리는 말은 단락의 뒷받침 재료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거울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지지한 발언을 인용한 것들은 모두 그 단락의 소주제문 곧 "먼저 거울은 필요하다는 ..."을 뒷받침한다. 아울러 인용문의 뒤에 딸리는 설명하는 말들 곧 "하고 한 학생이 말하자"나 "뒤쪽의 학생이..." 따위도 그 단락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인용문에 덧붙여지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들 딸림말에는 절대로 들여쓰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런 경우에 들여쓰기를 하게 되면 새로운 문단을 시작하는 것처럼 되므로 문단의 형식 구분에 혼선이 빚어진다. 우리 주변의 글에서는 이런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많으므로 본따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위의 보기에서는 그런 그릇된 들여쓰기를 하지 않고, 문단이 새로 바뀌는 곳("이 시점에서 벌써 무용론자의 목소리가...")에서 들여쓰기를 하였기 때문에 단락의 내용과 형식이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위의 보기와는 달리, 다음과 같은 글에서는 불합리한 들여쓰기가 됨으로써 단락의 형식과 내용의 일치에 혼선이 드러나고 있다,

[보기 8.10]

덕기는 조금 앉았다가 필순이더러 나가자고 눈짓을 하여 복도로 데리고 나왔다. 아까 필순이가 섰던 유리창 앞에 나란히 서서 덕기는 담배를 붙이며,

"김군 소식 못 들었지요?"

하고 찬찬히 말을 꺼낸다.

"아직 못 들었어요. 왜요? 무슨 일이 있어요?"

필순이는 눈이 똥그래지며 묻는다.

위 글에서 인용문의 뒤에 덧붙여지는 딸림 문장은 어느 경우나 동일한 기능이다. 그런데도 뒷쪽의 것("필순이는 눈이....")에는 들여쓰기를 하였다. 이 경우는 그 딸림말이 단지 주어로 시작된다는 차이밖에는 없다. 그 기능으로는 앞 쪽의 딸림말 "하고 찬찬히..." 와 똑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 뒷 쪽의 딸림말에 들여쓰기를 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이런 불합리한 들여쓰기는 단락의 형식 표지에 혼란을 가져 올 뿐, 아무 소득이 없다.

우리의 많은 글에서는 이런 불합리하고 쓸모없는 들여쓰기를 하는 일이 많다. 어떤 이가 잘못 알고 써버릇한 것을 무비판적으로 본따른 데서 빚어진 현상이다. 이런 일은 단락의 형식과 내용을 불 일치시키는 한 요인이 되므로 하루 빨리 시정되어야 마땅하다.

단락의 형식 표시는 글의 내용 전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인용의 경우와는 엄격히 구별하여야 한다. 이는 사소한 것 같지만, 글의 짜임새를 엮어 가는 데는 중요한 구실을 하며, 또 글을 읽고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구실을 한다.

4) 왜 단락의 형식과 내용을 일치시키지 못하는가?

우리의 많은 글에서 단락의 형식과 내용의 일치 문제에 대한 의식이 박약한 것이 사실이다. 그 까닭은 몇 가지로 분석이 될 수 있겠는데 그 주된 것만 들추어 보고자 한다.

첫째, 우리의 글짓기 전통에서는 단락이라는 단위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상태 교수가 지적하였듯이 우리의 이른바 고전에는 단락 의식이나 대문 의식을 가지고 쓴 글이 없다(이상태, <국어 교육의 기본 개념>). 그냥 하나 하나의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표현하였을 뿐이다. 하나의 주된 생각을 핵심으로 하고 그것을 떠받들어 심화하고 확대하도록 하는 사고 작용이 모자랐던 것이다. 비록 그런 집중적인 사고 작용의 펼침이 간혹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들여쓰기나 줄바꾸기 등으로 구획지어지는 일은 없었다.

둘째, 일본 사람들의 영향 때문이다. 일본 사람들은 우리보다 서양의 문명을 더 일찍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일제 교육을 통하여 그들의 수입 문화의 일단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그런데 문장론에 관한 한 그들 자신이 단락 의식을 뚜렷하게 깨치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 사람의 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우리들은 문장을 쓸 때에 "단락(paragraph)"에 대한 것을 별로 마음에 두지 않는다. 조금 길어졌으니 이 언저리에서 줄을 바꿀까하고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는 따위이다. 단락의 감각이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더구나, "이런 데서 줄을 바꾸면 어떻게 되는거야" 하고 화를 내는 독자도 없으니 천하태평이다.

--外山滋比古, <日本語의 個性> 중에서

위의 인용에서 보듯이 일본 사람들 자신이 단락에 대한 의식이 희박하다. 따라서 이런 일본 사람들의 글짓기 영향을 다분히 받은 많은 지식인들 역시 단락에 대한 확실한 의식 없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셋째, 사고 훈련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어떤 문제에 관해서 깊이 따지고 여러 각도에서 살펴서 그 본질적인 면을 파고들어가는 사고 훈련이 모자란다. 한 소주제에 관해서 좀더 진지한 태도로 깊이 파고 든다면 그렇게 짧고 피상적인 단락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를 따지고 생각하는 훈련을 쌓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종래의 한문 서당식 교육을 통해 자란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일제 시대 교육을 받은 사람, 그리고 최근의 입시 위주의 비정상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논리적 사고 훈련의 기회를 거의 가지지 못하였다. 이렇게 사고 훈련이 모자라면 문제를 파고들어 생각할 줄을 모르며 그 결과로 깊이 있고 무게 있는 단락의 형성이 어렵게 된다.

넷째, 현대의 간편주의의 경향 때문에 단락이 짧아지고 있다. 여기 간편주의란 모든 것을 간단하고 편하게 처리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길고 복잡하고 심각한 것은 피하고 엷고 가볍고 단순한 것을 바라고 즐기는 현대인의 사고 방식을 말한다. 이어령 교수는 현대의 한 특징을 "수필 문학 시대"라고 한 바 있는데, 길고 무게 있는 장편 소설 등을 기피하고 가벼운 수필 따위만 겨우 읽으려 한다는 것이다. 이도 역시 간편주의의 일면이라 할 만하다. 학문의 분야에서도 심오하고 보편적인 지식보다는 저널리즘적 태도로 가볍게 스치고 넘어가는 피상적 지식이 더 잘 팔린다. 이런 경향은 일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전후, 쉬운 문장은 좋은 문장이며, 짧은 문장은 쉬운 문장이고 따라서 좋은 문장이라는 상식이 바다 저쪽에서 건너왔다. 이른바 단문주의라는 것이다. 단락도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고 여기게 되었다. 더구나 신문 소설에 있어서 하얀 곳이 많이 있을수록 독자가 많다고 말하게 되었다. 곧 줄바꾸기가 많으면 그만큼 읽기 쉽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는 말이다. 일본어는 줄바꾸기를 좋아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外山, 윗 책에서

곧 일본어에서도 최근의 간편주의적 경향 때문에 짧은 문장, 짧은 단락이 유행하게 되었음을 증언해 주고 있다.

이상과 같은 몇 가지 이유에서 단락의 길이는 종래보다 짧아지는 경향이 생기고 있다. 그 결과 너무 빈번하고 뜻없는 줄바꾸기가 유행하고 있다. 이는 현대인의 사고 방식을 점점 간편주의로 흐르게 하고 피상적 지식과 옅은 삶의 자세를 낳고 있다.

[새김] 어떤 문장론서에서는 단락의 형식과 내용이 일치되지 않는 글들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형식 단락"과 "내용 단락"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듯하다. 곧 내용적으로는 한 단락인데 형식으로는 여러 단락으로 나누어 서술하는 글이 있을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것은 형식과 내용이 일치되지 않는 기성인들의 산만한 글들을 합리화하려는 궁여지책으로 나온 논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락의 표지인 들여쓰기가 단락의 내용적 구획을 짓기 위해서 생긴 것임을 모르는 데서 나온 괴설이다. 차라리 그런 구별을 하려면 단락이라는 용어를 아예 쓰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곧 우리 나라에서는 본래적 의미의 단락 이론은 없고 들여쓰기는 글의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 임의로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 솔직할 것이다. 단락 이론을 끌어 들이면서 그것을 망가뜨리는 괴설은 자가 당착의 문장 이론일 뿐이다. 우리는 이 점을 깊이 반성하고 문장론을 제대로 세우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저마다 딴소리를 하고 편법을 가지고 문장 이론을 펴서는 혼선만 일으키고 남의 웃음거리만 될 것이다.

더구나 형식 단락 운운하는 것도 일본 사람의 잘못된 견해를 본딴 것이라면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필자는 일본 사람의 문장론에서 그런 용어를 쓴 것을 본 일이 있다). 본시 몇백년부터 단락 이론을 펴서 널리 교육하고 생활화하고 있는 서구 문장론은 제쳐 두고 일본 사람들의 잘못된 전달 교육만 무비판적으로 쫓아서 그런 불합리한 견해를 퍼뜨리는 것은 하루 빨리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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