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글쓰기’ 신문은 주독일대한민국대사관 정범구 대사의 ‘대사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정 대사는 대사관 주변 이야기와 한독 관계 등을 사회관계망서비스 ‘페이스북’에 올리고 있습니다. 정확하고 간결하고 논리적인 문장으로, 외교관의 소소한 일상과 깊이 있는 사색, 강대국들과의 이해관계를 담고 있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글쓰기’의 모범사례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특히 다양한 현장 사진을 곁들여 국민들에게 외교관이 일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범구 대사는 충북 음성 출신으로 16대, 18대 국회의원을 거쳐 지난해 1월 독일 대사로 부임했습니다.

*지난 주도 일이 많았다. 키일(Kiel)에서 열린 독일통일 29주년 참석을 비롯해 출장거리 만도 2000 km가 넘었다. 길바닥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새삼 사라져 가는 시간들을 돌아보게 된다. 시간은 뒤로 흘러가는 것인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인가?

* 일요일, 모처럼 시간이 난 김에 벼르던 일 한가지를 실행에 옮겼다. 브란트를 도와 독일 통일의 주춧돌을 놓았던 에곤 바(Egon Bahr, 1922-2015)의 묘소를 찾아보는 일이었다. 빌리 브란트가 베를린 시장 때인 1960-66년 그의 공보실장으로 시작하여, 브란트 총리 시절 그의 비서실장, 특임장관 등을 맡아 동방정책(Ostpolitik)의 기틀을 잡았다. 1969년에는 브란트 특사로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전후 서독과 소련의 관계정상화를 가져온 모스크바 협정을 체결하도록 했고, 이후 물 밑에서 폴란드, 동독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작업을 추진하였다. 동방정책을 상징하는 구호, "접근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Annäherung)"는 바로 그의 작품이다.

 

에곤 바의 무덤.붉은 장미 한 송이가 여전히 그의 어깨 위에..
에곤 바의 무덤.붉은 장미 한 송이가 여전히 그의 어깨 위에.. (사진 = 정범구 대사)

 

* 그의 육신이 누워 있는 곳은 베를린 시내 한 시립묘지( Dorotheenstädtischer Friedhof)이다.
중앙역(Hauptbahnhof)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그의 묘지는 연방대통령(1999-2004)을 지냈던 라우 (Johannes Rau, 1931-2006)의 묘소와 마주 보고 있다.
전직 대통령과 장관이 시립 공동묘지에 서로 마주 보고 누워 있는 풍경이 정겹다. 두사람 모두 사민당(SPD) 출신으로, 생전에도 교분이 있었지만 사후에도 서로 마주 보고 있다는게 신기하다. 평생의 동지였던 브란트와 함께 누울 수 있었다면 바에게는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얼핏 해봤다. 각각의 묘소는 모두 두 평 남짓하다.
나는 에곤 바와 라우 대통령 모두 생전에 만나본 적이 있다. 바 장관과는 그가 은퇴한 후인 2000년대 초 서울에서 본 적이 있고, 라우 대통령은 2001, 혹은 2002년경 무슨 대표단의 일원으로 대통령궁을 방문해서 만나본 적이 있다. 살아서 그 숨결을 느껴봤던 이들이 이제는 영겁의 이불을 덮고 고요히 누워있는 공간에 서니 여러가지 생각이 스친다. "모든 일에는 다 끝이 있다"라는 생각도 그 중 하나.

라우 대통령 묘소
라우 대통령 묘소 (사진 = 정범구 대사)

 

* 라우 대통령 묘 옆에는 바로 나치와 히틀러에 항거하다 순교한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목사의 묘가 있다. 1943년 체포되어, 나치의 패망이 임박한 1945년 4월 9일 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에서 처형된다.
세상을 떠난 연대가 제각기 다 다른데 어떻게 묘소를 이렇게 배치해 놨는지 신기하다. 고백교회 (Bekennende Kirche) 운동을 통해 히틀러에 대항하다 처형된 본회퍼 목사는 독일의 양심으로, 기독교적 정의가 무엇인지, 하느님의 공의가 무엇인지를 여전히 우리에게 외치고 있다. 기독교인의 한사람으로, "개독교"라는 비난까지 받고 있는 오늘날 일부 한국 교회의 행태를 생각할 때, 그의 삶 앞에서 잠시 부끄러워졌다.

* 치열한 "현역의 삶"을 살았던 이들의 발자취를 더듬다가 문득 이들이 누워있는 공간 위를 여전히 흘러가고 있는 시간을 보았다. 산 자에게는 여전히 흘러가고 있는 시간.

그러나 이 또한 지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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