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특강 24 (특수단락:종결단락)

3) 종결 단락을 이루는 방법

종결 단락은 글을 끝 맺는 구실을 한다. 연극에서 마지막 막을 내리듯이 글에서도 마지막 마무리를 짓는 종결 단락이 있게 마련이다. 이 종결 단락은 일반 단락처럼 내용 전개나 뒷받침은 필요없고 다만 맺는 말 정도로 그친다. 종결 단락은 대개 다음 몇 가지 요령으로 쓴다.

(1) 본문 내용을 간추려 주제를 다지는 경우

본론에서 이미 밝혀진 결론을 간추려 되풀이한다. 이런 결론은 글 전체의 주제가 되는 수도 있고 그 주제를 여러 갈래로 하위 구분한 것일 수도 있다. 다음 [보기]는 글 전체의 결론(주제)을 간추려서 보인 종결 단락이다.

[보기 7.16]

이상에서 사람은 여러 가지 대상과 방법을 통하여 배운다는 것을 밝혔다. 첫째로, 사람은 사람에게서 배우며, 둘째로, 자연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운다. 셋째로, 내면적 사유를 통하여 많은 것을 탐구하고 깨닫는다. 이렇게해서 인간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학문의 길이다.

--박종홍, "학문의 길"에서 중에서

(2) 주제만을 상기시키고 전망을 한다

주제를 마지막으로 상기시켜서 다짐하고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를 전망하는 것이다.

[보기 7.17]

그러므로, "은근"은 한국의 미요, "끈기"는 한국의 힘이다. 은근하고 끈기있게 사는 데에 한국의 생활이 건설되어 가고, 또 거기서 참다운 한국의 예술, 문학이 생생하게 자라 날 것이다. --조윤제, "은근과 "끈기" 중에서

(3) 글의 주제와 관련된 어구 등으로 여운을 남긴다

주제를 뚜렷이 상기시키는 대신에 관련된 표현으로 여운을 남기면서 끝맺는 경우이다.

[보기 7.18]

1670년 경에 네델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비록 내일 세계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구루의 사과 나무를 심겠다."라고 했거니와, 마치 세상이 오늘만으로 끝나는 듯 착각하고 사는 우리들의 "조급증"은 언제나 사라질 것인가.

(4) 종결 단락은 글을 말무리하면서 남은 문제점을 가리키거나 전망을 곁들이기도 한다

때로는 본론에서 서술한 내용을 간추리지 않고 독자에게 바라는 점이나 앞으로의 전망만을 적고 끝맺는 수도 있다.

[보기 7.19]

한국 사회에 공업화 현상이 진전함에 따라 그것이 뿜어 내는 거대한 생산력이 한국 사회와 그 속의 구성원의 성격을 크게 바꾸어 갈 것이며, 정치와 사회의 구별이 더 뚜렷해짐에 따라서 새로운 권력 구조의 형성이 불가피해질 것이다.

정치의 주체자로서의 민중의 힘이 자람에 따라 한국 정치의 미래상도 크게 바뀌게 될 것으로 가늠해 보는 것이 희망적인 관측만은 아닐 것이다.

--한배호, "민중이 정치의 주인이 되기까지" 중에서

물론 필자의 요망이나 전망은 글의 주제에 얽힌 것이어야 한다.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 되어서는 통일성이 결여된다.

종결 단락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유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글의 성격이나 필자의 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특색있는 마무리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특히 유의할 점은 글의 주제나 본문의 내용과 동떨어진 마무리를 해서는 안 되며, 또한 새로이 딴 문제를 논의해서 추가해서는 안 된다. 마무리는 끝맺는 일만 해야지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4) 주단락과 종속 단락

주단락과 종속 단락은 서로 짝을 지어 쓰인다. 주단락은 일반으로 그 단락에서 다룰 소주제를 개괄하여 보이고, 종속 단락은 주단락에서 보인 소주제를 자세히 뒷받침하여 펼치는 구실을 한다. 이처럼 주단락과 종속 단락의 분할 사용은 대개 소주제가 매우 중요하여 좀더 깊이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일반 단락 하나로 다루는 것이 상례이다. 곧 주단락과 종속 단락은 다루는 소주제가 글 전체 주제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경우에 그것을 강조하기 위한 방편으로 가끔 쓰인다.

[보기 7.20]

이웃 사랑은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우리를 흐뭇하게 만든다. 하나는 이웃을 기쁘게 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여기 이웃이란 우리의 형제 자매, 가까이 사는 사람, 아는 사람 나아가서 우리와 공동 운명체를 이루는 모든 이들을 말한다.

"이웃을 기쁘게 하는 일"이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기쁘게 해 준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고 조그마한 사랑이라도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즐겁게 해 주는 일이 많다. 가령, 아무도 돌보지 않고 있는 불우한 사람, 외로이 사는 노인들,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게는 우리의 조그마한 성의만으로도 커다란 기쁨의 선물을 안겨 주게 된다.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이란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에게도 기쁨의 보상이 따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좋은 일을 한다든지 남을 사랑하게 되면 사랑 받는 것 못지 않게 흐뭇한 느낌을 지니게 된다. 사랑이란 받는 것 보다 주는 것이 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고 하는 말은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웃 사랑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들어서 사랑의 수로가 열리는 결과도 낳는다.

대개 종속 단락에서 다루는 과제에는 따옴표를 하여 일반 단락과 구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종속 단락임이 명확한 경우에는 그런 표시가 없어도 되나, 일반으로 그런 표시를 하는 것이 요지 파악에 도움이 된다.

5) 그 밖의 특수 단락 문제

이상에서 특수 단락에 관하여 살펴보았거니와 이 밖에도 강조 단락, 보충 단락, 회화 단락을 내세우는 이가 있다. 그러나 이런 특수 단락은 몇 가지 점에서 바람직스럽지 않다.

강조 단락은 내용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임의로 새 단락을 만들어 그 부분을 시각적으로 강조하는 단락이라 한다. 내용으로 봐서 앞 단락에 붙여도 좋을 것을 그 부분만 떼어서 따로 단락을 만들어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강조단락의 정의는 얼핏 보아 타당성이 있는 듯하나, "시각적 강조"라는 점에 문제가 있다. 글이란 눈으로 보는 것이라기보다는 마음으로 읽는 것이다. 따로 줄을 바꾸어 한 문장을 써 놓으면 얼른 눈에 띄는 효과는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강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전후의 뒷받침문장들에서 분리시켜 따로 적어 놓으면 딴 명제처럼 느껴져서 그 강조 효과가 줄어질 수가 있다. 더구나 우리 나라의 글에서는 이런 강조 단락이라는 명목으로 줄 바꾸는 일이 너무 잦아서 결국 시각적 강조의 효과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니 강조 단락의 남용은 단락의 형식과 내용의 관계만 산만하게 만들 뿐이다.

보충 단락은 "전 단락에서 빠뜨린 내용을 추가 보충하는 것이다" 라고 정의하는 이가 있다. 그런데 이는 자칫 단락의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를 조장할 가능성이 많다. 앞 단락에서 빠뜨린 것이면 거기에서 다시 조정하여 보충할 것이지, 새로 단락을 만들어서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또 만일 앞 단락에서 다루기에는 너무 분량이 많을 경우라면 종속 단락의 형식을 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니 보충 단락이라는 또 다른 개념을 허용해서 글의 짜임새를 산만하게 해서는 안 된다.

회화 단락을 따로 설정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문장 속의 대화를 각각 하나의 단락으로 본다는 것인데, 그것은 단락 형식으로 처리하기보다는 회화체나 인용문의 특수 형식으로 봄이 타당하다. 이들을 표시하는 데 줄을 바꾸고 들여쓰기를 한다고 해서 단락이라 보는 것은 단락의 개념에 혼선을 야기시킬 뿐이다. 단락은 형식과 함께 뭉뚱그려진 내용이 담겨질 경우로 한정하는 것이 좋다. 낱낱의 대화 문장은 내용 면에서 한 단락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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