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한학성 (경희대) 교수

우리 사회에는 도처에 영어 간판이 서 있다. 한국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상점이 영어로만 된 간판을 걸어도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일까? 뿐만 아니라 정부나 지자체에서는 수시로 영어 이름을 붙인 정책을 남발하며, 공문서 등에도 영어를 남용하는 일이 빈번하다. 이런 일들이 과연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일까? 이 글에서는 이 점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1. 옥외광고물 등의 관리와 옥외광고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 시행령

옥외광고물 등의 관리와 옥외광고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3장 제12조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제3장 광고물 등의 표시방법

제12조(일반적 표시방법)

① 법 제3조 제3항에 따른 광고물 등의 표시방법은 이 장에서 정하는 바에 따른다.

② 광고물의 문자는 원칙적으로 한글맞춤법, 국어의 로마자표기법 및 외래어표기법 등에 맞추어 한글로 표시하여야 하며, 외국문자로 표시할 경우에는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한글과 병기(倂記)하여야 한다.

즉 이 시행령 12조 2항에 따르면 간판을 비롯한 옥외광고물의 문자는 원칙적으로 한글로 표기하여야 하며, 외국 문자로 표기할 경우에도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한글과 병기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한글 없이 영어로만 표기한 광고물은 이 시행령을 위배하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행령을 위반하는 업주들에 대해 아무런 제재도 가해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다시 말해, 이 시행령은 있으나마나한 것이다. 광고물에는 원칙적으로 한글을 사용해야 한다고 법령으로 정해도 지킬 필요가 없는 사회,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사실 이 시행령은 ‘외국 문자를 표시할 경우’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없어 이미 빠져나갈 구멍을 열어놓고 있는 셈이다. 거기에 더해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에서 그 ‘특별’한 사유에 대한 조건도 없으므로, 한 번 더 빠져나갈 구멍을 열어주는 셈이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이 법률 시행령은 “광고물의 문자는 원칙적으로 외국 문자로 표시하여야 한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결과를 가져오는 셈이다.)

더욱이 국내 상표이거나 순전히 내국인을 위한 상점에서 영어로만 된 간판을 설치하는 것은 ‘특별’한 사유에 해당한다고 보기도 어려우므로 당연히 이 시행령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내가 2013년 8월 강원도 동해시에 갔을 때 들린 바닷가 어느 커피점의 사진이다.

간판이 온통 영어로만 되어 있다. 이 집의 간판을 외국인을 위해 영어로 달아야 할 필요가 있는지도 의문이고, 또 한글을 병기하지 않을 만큼 ‘특별’한 사유가 있다고 보기도 어려우므로 이는 앞에서 언급한 법률 시행령을 명백히 위배하는 것이다.

그런데 특별한 사유에 해당해 한글을 병기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한글의 크기가 영어에 비해 지나치게 작다면, 이 역시 문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글을 영어 등 외국 문자와 병기하는 경우에는 당연히 한글이 다른 외국 문자에 비해 작게 표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두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현행의 옥외광고물 등의 관리와 옥외광고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 시행령 12조 2항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수정 제안>

② 광고물의 문자는 원칙적으로 한글맞춤법, 국어의 로마자표기법 및 외래어표기법 등에 맞추어 한글로 표시하여야 하며, 외국인을 위한 목적 등 특별한 사유가 있어 외국문자로 표기할 경우에는 한글과 병기하되, 한글의 크기가 외국 문자의 크기보다 작아서는 안 된다.

이와 관련하여 명동에 있는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간판 표기가 적절한 것으로 생각된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같은 단체의 간판은 외국인들이 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을 터이므로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리 크지 않은 크기로 영어 설명을 병기해 놓았다.

같은 명동에 있는 다이소라는 업체의 간판도 유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주로 영어 간판만을 내거는 외국 상표 상점의 경우도 특별한 상황에서는 한글을 주된 문자로 사용하고 영어를 작게 병기하는 경우도 있다. 다음은 인사동에 있는 스타벅스 점의 간판이다.

평소에는 한글 없이 영어로만 된 간판을 주로 내거는 이 커피전문점이 인사동이라고 해서 굳이 큰 글씨의 한글 간판을 단 이유는 무엇일까? 인사동이 한국적인 것을 찾아 외국인이 많이 찾는 거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외국인이 많이 찾는 거리에 오히려 한글 간판이 강조된다는 것은 그 외의 거리에서는 굳이 영어 간판을 내걸 이유가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이는 또한 외국인을 위한다고 해서 광고물의 문자는 원칙적으로 한글로 표기하여야 한다는 현행 옥외광고물 등의 관리와 옥외광고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 시행령 12조 2항의 원칙을 훼손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다음은 광화문 세종대왕상 근처에 있는 같은 상표 가게의 간판이다.

같은 상표의 인사동 가게에서처럼 한글이 영어보다 월등히 큰 것은 아니지만, 한글 글씨와 영어 글씨 간의 균형이 잡혀져 있다.

근처의 다음 간판들도 눈에 띈다.

다른 곳에서는 영어를 강조한 간판을 내거는 이 가게들이 한글 간판을 내걸고 있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상이 근처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광화문처럼 외국인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에도 얼마든지 한글 간판을 사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그렇게 할 의지가 있느냐 하는 것인데, 그런 의지를 갖지 않으면 안 되게끔 정부나 지자체가 기존의 옥외광고물에 관한 법령을 적절히 손질한 후 엄격히 집행하여야 할 것이다.

2. 언론과 공공기관의 영어 오남용

2017년 한글날을 며칠 앞두고 오마이뉴스는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를 내걸었다.

그런데 박원순 서울시장이 한글날을 기념하는 행사를 한다는 기사가 나간 바로 그 시기에 서울시청 누리집 대문에는 다음과 같은 행사 홍보물들이 내걸려 있었다.

한글날을 기린다고 하면서 그 즈음의 행사 이름을 ‘서울뮤직시티커넥션’이라고 영어로 짓는 것은 무슨 마음에서일까? 그래도 이때는 한글로 적기라도 했지만, 그 아래 행사의 경우에는 한글보다 영어를 더 많이 사용해 적어 놓았다. 행사 기간을 알리기 위해 ‘Tue’, ‘Thu’처럼 영어를 사용한 것도 한글날을 기념하는 서울시와 서울시장의 진심에 의문을 갖게 만든다. 만일 세종대왕이 실제로 박원순 시장을 만났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다음은 당시에 함께 걸려 있던 박원순 시장 소개 화면이다.

자신을 ‘소셜 시장’으로 소개하고 있다. 2019년 9월 현재 이 사진은 다음 사진으로 교체되었지만, ‘소셜시장’이라는 말은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 표현이 무척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그런데 ‘소셜’시장이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그 뜻을 우리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었을까? ‘공약&매니페스토’는 또 무엇일까? ‘&’라는 기호가 꼭 필요했을까? 세종대왕께서 박 시장에게 큰 소리로 꾸지람할 것만 같다.

그런데 서울시청 누리집 대문 아래쪽에는 2018년 7월 1일까지만 해도 다음과 같은 서울시 사업 및 산하 기관 누리집에 대한 안내가 나와 있었다.

60개의 이름 중 1/3 정도의 이름에 영어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포털’, ‘센터’, ‘카페’ 등 자주 사용되는 단어뿐 아니라 ‘태깅’ 등 생소한 단어도 사용되어 있고, ‘스토리인서울’, ‘페스티벌인서울’처럼 전체를 아예 영어 어법에 맞추어 만든 이름도 있다. ‘재개발재건축클린업시스템’, ‘서울글로벌센터’ 같은 이름에는 지나치게 많은 영어 단어가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그 뜻도 명확하지가 않다.

앞에서 한글날 행사를 개최하면서도 정작 우리 말글에 대한 개념 자체가 크게 미흡한 서울시의 경우를 지적하였지만, 이는 비단 서울시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관공서나 교육기관, 그리고 언론기관이 거의 비슷한 양태를 보인다. (참고로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실시한 2017년 바른 공공언어 사용 확산 평가에서 서울시가 광역 지방자치단체 중 전국 최우수 기관으로 선정되었다고 하니, 다른 지자체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2019년 9월 26일 현재 서울시 누리집 대문에는 “휴먼시티디자인어워드”, “Design It Yourself”, “워라밸 꿀팁 대방출”, “With 米 페스티벌 Rice to Meet You”, “인서울마켓”, “2019 G밸리 Week”, “Seoul Music Festival” 등의 광고가 떠 있다.)

다음은 2017년 한글날과 관련한 기사 제목의 예이다.

성남문화재단 책테마파크, 한글날 기념축제 열어 (2017년 9월 28일 헤럴드경제)

한글날 기념 서예 퍼포먼스 (2017년 10월 8일 뉴시스)

신토르X헐ㅋX록희X밝히리…'토르' 한글날 기념 팬서비스 (2017년 10월 9일 스포츠조선)

한글날을 기념한다는 기사 제목에 ‘테마파크’, ‘퍼포먼스’, ‘팬서비스’ 등의 영어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 공공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성남문화재단에서 다른 날도 아닌 한글날을 기념하는 행사의 이름을 ‘책테마파크’라고 정하는 것이 과연 적절할까? 「신토르X헐ㅋX록희X밝히리…'토르' 한글날 기념 팬서비스」라는 기이한 제목의 기사 앞부분은 다음과 같다.

명실상부 올 가을 마블 최고의 메인 이벤트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가 한글날을 기념하여 국내 팬들을 위한 스페셜한 이미지, 바로 한글날 기념 포스터 4종을 전격 공개해 유머까지 선사한다.

'토르: 라그나로크'는 온 세상의 멸망 '라그나로크'를 막기 위해 마블 최초의 여성 빌런 헬라에 맞선 토르가 헐크와도 피할 수 없는 대결을 펼치게 되는 2017년 마블의 메인 이벤트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가 10월 9일 한글날을 기념해 영화의 메인 주역 4명이 등장하는 한글날 기념 포스터를 전격 공개하며 국내 팬들의 기대감에 불을 지피고 있다. 한글날 기념 포스터는 이전에 공개되었던 강렬한 캐릭터 포스터에 각 캐릭터의 특징을 십분 살려 한글로 탈바꿈한 이름이 궁서체로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유머러스한 한국어 네이밍으로 팬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2017년 10월 9일 스포츠조선)

한글날을 기념하여 외국 영화 주인공의 이름을 한국어로 바꿔 보여준다는 것이 주된 내용인 이 기사는 정작 기사 자체에는 ‘마블’, ‘메인 이벤트’, ‘스페셜한 이미지’, ‘빌런’, ‘메인 주역’, ‘유머러스한’, ‘네이밍’ 등 불필요한 영어 표현을 마구잡이로 섞어 쓰고 있다. 기사를 작성한 기자의 수준과 감각뿐 아니라 편집책임자의 의식이나 업무 태도마저 의심하게 만든다.

다음은 2016년 10월 8일 한글날 행사와 관련한 연합뉴스TV 보도의 앞부분이다.

3만제곱미터의 아스팔트가 커다란 스케치북이 되고 퍼레이드에 세종대왕이 나섭니다. 서울 서초구는 휴일 오후 내내 잠수교와 반포대로 양방향 전차로를 통제하고 서리풀 페스티벌 행사를 개최합니다. 행사에는 대략 15만명이 참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서초역에서 서초3동 사거리 구간에서는 색색의 분필 2만4천갑으로 한글을 넣은 그림 그리기를 합니다. 이어 비행선 2대와 드론 5대가 상공을 날고 오색 연화가 쏘아올려지는 가운데 서초강산 퍼레이드를 시작합니다. 수십여대 수방사 헌병대 싸이카와 염광고 마칭밴드가 앞장서고 세종대왕 분장을 한 인물이 훈민정음 기수단 행렬을 이끕니다.

한글날 행사를 보도하면서 ‘아스팔트’, ‘스케치북’, ‘퍼레이드’, ‘페스티벌’, ‘마칭밴드’ 등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영어 단어뿐 아니라 ‘싸이카’처럼 국적불명의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 역시 해당 기자의 수준과 감각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다.

한글날이 되면 평소에는 ‘NAVER’, ‘DAUM’처럼 영어로 적던 이들 기업의 이름도 ‘네이버’, ‘다음’처럼 한글로 바뀐다. 한글은 1년 365일 중 한글날 단 하루만 신경 쓰는 척하면 된다는 것일까? 다음은 이들이 평소 그들의 초기화면에 제시하는 회사 이름과 2017년, 2018년 한글날에 제시한 회사 이름이다. 평소에는 영어로 된 회사 이름을 사용하다 오직 한글날 단 하루에만 한글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2017년에 네이버는 한글날을 기리기 위해 다음과 같은 행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한글날을 기리는 행사를 한다면서 굳이 이름에 ‘스퀘어라운드’라는 영어 단어를 붙여야 했을까? 도대체 어떤 행사를 염두에 두고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일까?

교육기관도 예외는 아니다. 다음은 2017년 한글날을 기념하여 전남대학교에서 개최한 한국어 말하기 대회를 알리는 포스터이다.

개최 장소가 ‘전남대학교 GnR Hub 1층 세미나실, 공과대학 4호관 코스모스홀’로 되어 있다. 겉으로는 한글날을 기념한다고 하면서, 굳이 행사 장소를 ‘GnR Hub’, ‘코스모스홀’처럼 영어로 되어 있는 곳을 정한다는 것 자체가 한글날이나 한글에 대한 그들의 감수성 정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날 행사에 참석한 외국인들이 ‘GnR Hub’라고 적힌 건물에 들어오면서 과연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도대체 전남대는 애초에 건물 이름을 왜 이렇게 정했을까?

이러한 행태는 우리나라 공공기관 거의 전부에 걸쳐 나타난다. 다음은 2016년 한글날 직전인 10월 7일에 교통방송(tbs)이 보도한 내용이다.

문화체육관광부 등 정부 부처와 각 지방자치단체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습니다.

첫 화면에는 대한민국 고 캠핑, 강소·벤처·스타트업 청년매칭 2016년 잡페어, 덕수궁 피크닉 등 행사명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또 클릭 한 두 번이면 코리아 프리미엄 창출을 향한 문화융성 추진계획, 원스톱 서비스, 패션 클러스터와 같은 난해한 행정용어가 보입니다.

심지어 지자체들의 대문이라 할 수 있는 브랜드명 또한 Dynamic 부산, Pride 경북, It’s 대전 등 의미를 한 번에 정확히 알 수 없는 명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글을 앞장서서 지켜야 할 공공기관들이 세계화, 국제화를 내세우며 외국어, 외래어를 남용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국민들이 정확한 의미 파악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몇 해 전부터 정부 부처와 지자체가 무분별한 외국어, 외래어 사용을 지양하고 한글로 대체하겠다는 발표를 속속 내놨지만 아직까지 큰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말글에 관한 주무부처인 문화관광부마저 이런 실정이니, 다른 정부부처나 지자체, 그리고 기타 공공기관의 경우는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여겨진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국어기본법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나라 공공기관의 영어 남용, 그리고 그에 따른 한국어/한글 홀대는 바로 이 국어기본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다.

3. 국어기본법

국어에 관한 핵심 법률로 이 법률 중 주요 조항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4조(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 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변화하는 언어 사용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국민의 국어능력 향상과 지역어 보전 등 국어의 발전과 보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제10조(국어책임관의 지정) ①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국어의 발전 및 보전을 위한 업무를 총괄하는 국어책임관을 소속 공무원 중에서 지정하여야 한다.

제14조(공문서의 작성) ① 공공기관 등은 공문서를 일반 국민이 알기 쉬운 용어와 문장으로 써야 하며,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 다만,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경우에는 괄호 안에 한자 또는 다른 외국 글자를 쓸 수 있다.

제15조(국어문화의 확산) ①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은 바람직한 국어문화가 확산될 수 있도록 신문·방송·잡지·인터넷 또는 전광판 등을 활용한 홍보와 교육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여야 한다.

② 신문·방송·잡지·인터넷 등의 대중매체는 국민의 올바른 국어 사용에 이바지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나라 정부부처, 지자체, 언론기관 등에서 영어를 남용하는 것은 위에 소개한 국어기본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우선 정부부처와 지자체에서 영어를 남용하는 것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국어의 보전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는 국어기본법 제4조 1항 위반이다. 또 언론기관에서 영어를 남용하는 것은 “신문·방송·잡지·인터넷 등의 대중매체는 국민의 올바른 국어 사용에 이바지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는 국어기본법 제15조 2항 위반이다. 앞에서 간판 등에 관한 법령 위배에 무기력한 우리 사회는 정부부처 등 공공기관이 자행하는 국어기본법 위배에 대해서도 무기력하기만 할 뿐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국어기본법 10조 1항과 14조 1항도 있으나마나한 조항에 불과하다. 국어기본법 제10조 1항은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국어의 발전 및 보전을 위한 업무를 총괄하는 국어책임관을 소속 공무원 중에서 지정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정부부처나 지자체의 주요 정책 이름이나 정책 홍보물에 영어 등 외국어가 남용되고 있다면, 도대체 국어책임관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은 2018년 4월 18일 한국방송(KBS) 보도 내용이다. 부산 신도시 이름에 관한 보도를 하면서, 국어책임관에 관한 보도를 하고 있다.

부산시는 도시 위상을 높이겠다며 새 이름을 짓고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걸러진 후보는 '넥스텀(NEXTUM)'과 '센타스(XENTAS)', '웨스트마크(WESTMARK)', '맥(MACC)', '빅드럼(BIG DRUM)' 등 5가지.

'가장 앞선', '거대 도시' 등의 뜻을 담은 영어 표현입니다.

[배병철/부산시 좋은기업유치과장: "(명지지구가) 경제자유구역 활성화 측면에서 외국인 투자 유치라든지..."]

'공공언어'의 정체성을 잃었다며, 관련 단체들의 비판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김영선/동아대 언어교육원장: "그러한 언어가 사용됨으로써 그 언어문화가 미치는 파급 효과는 대단히 파괴적이고, 부정적이기 때문입니다."]

부산시는 명칭 선정 과정에서 법 절차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국어기본법과 시 조례에는 국어 보전 업무를 총괄하는 국어책임관을 지정하고 주요 정책 사업 명칭을 정할 때는 사전에 협의하도록 돼 있습니다.

하지만 명칭 선정 과정에서 국어책임관은 아예 빠졌습니다.

법 규정까지 무시한 명칭 선정과 부서 간 엇박자 행정으로, 국적 불명의 이름을 단, 또 하나의 신도시가 탄생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됩니다.

있으나마나한 국어책임관 제도는 국어기본법의 사문화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신도시 이름이나 주요 정책 이름에마저 공공연하게 영어를 사용하는 정부부처나 지자체가 공문서에 한글을 사용하라는 국어기본법 제14조 1항을 준수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격이다.

다음은 2016년 10월 7일 한글날에 즈음하여 대전일보가 보도한 내용이다.

정부를 비롯한 일반 행정기관 등에서 공공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이른바 '공공언어'에 영어식 표현과 어려운 한자가 과도하게 쓰이는 현상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아직도 데이터베이스(DB), 유비쿼터스(Ubiquitous), MOU(memorandum of understanding), 바우처 제도(Voucher System) 등 쉽게 의미를 알 수 없거나 추가설명이 필요한 단어들이 정부기관의 공문서에서 흔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6일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발간한 '쉬운 공공언어 쓰기 길잡이'에 따르면 국립국어원의 2013년 자체 점검 결과, 중앙행정기관 보도자료에서 로마자와 한자를 그대로 노출해 생긴 문제점이 45%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로마자로 쓴 R&D(연구개발), ICT(정보통신기술), MOU(양해각서) 등은 관련 분야 종사자에게는 익숙할 수 있지만 대부분 전문성이 강해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또 사회惡(사회악), 全員(전원), 對(대) 등 과도한 한자 사용, 'Dynamic Korea(다이내믹 코리아)', 'Hi, Seoul(하이 서울)'과 같은 영어 표현을 남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공공기관 등의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국어기본법 제14조에 따라 로마자 등 외국 글자와 한자는 불가피한 경우에만 적되 괄호 안에 적는 것이 바람직한데도 이를 지키지 않고 있는 것.

이와 함께 (사)한글문화연대가 지난해 4-6월 17개 정부부처에서 낸 보도자료 총 3270건을 분석한 결과, 국어기본법을 위반한 사례는 한 건의 보도자료당 평균 4.0회로 조사됐다.

외국어 남용 비율은 보도자료마다 평균 7.3회로 나타났다. 2014년에 비해 국어기본법 위반 사례는 증가하고 외국어를 한글로 적기만 하는 비율은 조금 감소한 수치다.

공문서는 한글로 작성해야 한다는 국어기본법 제14조 1항을 정부가 앞장서서 위반하고 있다는 지적은 늘 있어 왔다. 그것이 고쳐지지 않고 있는 것은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나라 공무원들의 무사안일 때문이다. 대통령부터 국어기본법에 대한 이해를 해야 하고, 이를 강력히 집행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 사람을 문체부 장관으로 임명해야 할 것이다. 어느 대통령이든지 그의 임기 5년 동안만 이 정책을 강력히 시행하면, 그 후로는 자연스럽게 국어기본법이 지켜지는 문화가 확립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정부에서도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2017년 6월에 출범한 이번 정부의 초대 문체부 장관은 시인이라면서도, 그 해 한글날 문체부 누리집에 한글날과 관련한 안내문조차 내걸지 않았다. 게다가 ‘대한민국 정부 대표 포털’이라는 ‘정부24’에 들어가 문체부 산하 기관의 누리집을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화면이 뜬다 (2019년 1월 현재).

첫 화면부터 영어 문자, 영어 단어가 사용된 이름들이 상당수 등장한다. 이 외에도 ‘타이포잔치 2015’, ‘코리아플라자’, ‘공예트렌드페어’, ‘공공누리포털’, ‘한옥스테이’, ‘e-브리핑’, ‘관광아이디어뱅크’, ‘코리아플라자 온라인커뮤니티’, ‘지구촌스마트여행’, ‘21c 한국음악프로젝트’, ‘온라인사진갤러리’, ‘weekly 공감’,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아카이브’ 등 다양한 이름들이 등장한다.

위의 화면에서 세 번째로 보이는 ‘스마트글램코리아’라는 희한한 이름의 기관으로 들어가면 다음과 같은 안내가 뜬다.

‘스마트글램코리아’라는 이름을 ‘문화LOD’로 바꾸었다는 것인데, 우리나라 문화와 관련된 정보를 검색하는 이름을 굳이 이렇게 지어야 할까?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관리 감독하는 기관이나 사업의 이름마저 이런 실정이니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은 바람직한 국어문화가 확산될 수 있도록 신문·방송·잡지·인터넷 또는 전광판 등을 활용한 홍보와 교육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여야 한다”는 국어기본법 15조 1항이 지켜질 리 만무하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화체육부마저 국어기본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정부 스스로 법을 어기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 최종 책임은 정부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지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대통령도 우리의 얼인 우리말과 관련된 국어기본법을 지키지 못하는 대통령인 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한학성 (2000) 영어 공용어화, 과연 가능한가, 책세상.

한학성 (2005) 우리 시대 영어 담론: 그 위선의 고리들, 태학사.

한학성 (2016) 영어 그 안과 밖, 채륜.

한학성 (2019) 우리 말글살이와 영어 표기, 채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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