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수많은 서양 어휘들을 '가타카나'로 옮긴 뒤 실용적으로 사용
한글이 우수한 문자지만 한자, 외래어의 중요성도 인식하고 활용해야

장시정 전 독일 함부르크 총영사. 현 독일모델연구소 소장.
장시정 독일모델연구소 대표.

'글쓰기' 신문은 2019년 5월 6일 창간호부터 '세계로 열린 창'을 주제로 장시정 독일모델연구소 대표의 글을 연재합니다. 장시정 대표는 36년간 외교관(카타르 대사, 함부르크 총영사 등) 생활을 마치고 지금은 독일모델연구소 대표 겸 1인 연구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작년 상반기 세종도서 교양부문에 선정된 '한국 외교관이 만난 독일모델'을 저술한 바 있습니다.[편집자 주]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가 나폴레옹 치하의 독일 베를린에서 “독일국민에게 고함”이란 연설로 독일 국민들의 용기를 북돋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807년 12월부터 1808년 4월까지 14회에 걸쳐 행해진 연설에서 그는 독일 민족을 다른 민족과 구별하는 뚜렷한 특징으로 언어를 지목했다. 독일어는 외래어를 사용치 않고 모든 개념을 자기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살아있는 언어라 했다. 인간이 언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인간과 인간 정신을 만든다고도 했다.

나폴레옹 치하의 베를린에서 연설하는 피히테.
나폴레옹 치하의 베를린에서 연설하는 피히테.

서양어에서는 영어가 가장 많은 어휘를 갖고 있다고 한다. 사전에 실려있는 단어 숫자가 50만 개 정도인데, 영어에는 많은 라틴어가 쓰이고 있을 뿐 아니라 11세기 노르망인들이 영국을 정복하면서 -Norman conquest- 프랑스 말도 영어에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독일어는 개념을 나타내는 명사가 발달했고, 특히 낱말을 몇 개씩이라도 붙인 복합어compound는 사전에 다 실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들 복합어는 그 추가된 낱말의 뜻만큼 조금씩 다른 어의를 갖고 있는데, 이 복합어를 포함하면 독일어가 영어보다 어휘가 더 많을 거라 한다. 독일의 문. 사. 철의 힘은 바로 이 독일어로부터 출발한 건 아닌지. 독일문화에 열광한 프랑스 철학가 이폴리트 텐Hippolyte Taine은 “오늘날 세계 지성사를 지배하고 있는 주도적 사상이 모두 1780~1830년 간의 50년 동안 독일에서 나왔다”고 했다. 이같은 독일의 세계 지성사 주도는 독일어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한글로 돌아와 보자. 2011년 내가 카타르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10월 9일 한글날이었는데 루마니아 대사로부터 한글날 축하 인사를 받았다. 그는 언어학자인데 평소에 나만 보면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곤 했다. ‘한글의 탄생’을 저술한 노마 히데끼野間秀樹는 한글이 태어나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그 신비로움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일이라며, 한글의 탄생-그것은 문자의 탄생이자 [지知]를 구성하는 [원자原子]의 탄생이기도 하고 [쓰는 것]과 [쓰여진 것], 즉 [에크리튀르ecriture]의 혁명이자 새로운 미를 만들어 내는 [게슈탈트Geschtalt=형태]의 혁명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다. 우리는 한글이라는 빛나는 문화유산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유아독존에 빠져서는 안된다.

나는 언어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영어와 독일어를 오래 전부터 배웠고 사용해 왔다. 지금은 40년 전 시험 준비할 때 배웠던 일본어를 다시 배우고 있고 중국어도 초급 과정을 시작했다. 언어는 그 나라 문화의 창이다. 언어를 배우면서 그 나라 문화의 편린이나마 접해 보는 즐거움도 있다. 내가 이번에 9년간의 해외 생활을 마치고 귀국해 보니 한국 사회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물론 그전에도 5~6 년간의 해외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보면 한국 사회가 달라져 있곤 했지만 이번 마지막 귀국에서는 정말 엄청난 변화를 실감해야 했다.

그 엄청난 변화에 대한 나의 전반적인 인상은 아쉽게도 긍정보다는 부정에 가깝다. 미세먼지, 무질서한 교통질서, 공중 생활에서 남을 배려치 않는 관습과 문화, 대립 구도의 분열된 사회 등등….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언어적 측면에서는 외래어가 무분별하게 우리의 일상으로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아파트, 자동차, 컴퓨터 브랜드부터 하다못해 빵집이나 식당 이름까지 영어, 불어, 이탈리아어로 된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이름들이 난무하고 있다. 자동차나 컴퓨터의 브랜드 이름이야 세계화된 세상에서 수출도 해야 하니 그렇다 치더라도 국내에서만 통용되는 상품들의 이름을 꼭 그렇게 서구식으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것이야말로 언어 사대주의가 아닐까.

이렇게 개방적인 듯한 우리 언어생활에서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게 있다. 왜 한자 병용을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한자는 중국 글자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명확하지 않다. 독일 사람들 말대로 하자면 ‘야인jain’ 이다. 이것은 ‘야ja’ 와 ‘나인nein’ 을 합친 말이다.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말이다. 나는 한자는 중국의 글자라기보다는 아시아의 글자로 보고 싶다. 중국에서 만이 아니라 일본, 대만, 홍콩, 베트남, 한국에서도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라틴 글자인 알파벳도 마찬가지다. 로마 글자가 아니라 서양의 글자이며 세계의 글자다.

'한글의 탄생' 책 표지.
'한글의 탄생' 책 표지.

지금 우리말은 크게 3가지의 어휘로 이루어져 있다. 고유어, 한자어, 외래어다. 이 중 한자어와 외래어는 원래 우리 말이 아니다. 그러기에 한자어와 외래어는 한글 표기만으로는 원 의미를 알기 쉽지 않다. 그래도 영어는 많이 배우고 있어 웬만한 외래어는 그 의미를 원어로부터 이해한다지만, 한자어는 한글 전용 정책으로 그 어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사용하고 있다. 왜 한글 전용을 고집하는가? 이것은 우리 말에 대한 이해력을 심각히 제한하며 더 나아가 우리의 생각이나 사고마저도 제약한다.

일본어도 우리말과 마찬가지로 야마토 말和語, 한자어, 외래어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자어는 한자로 표기하고 외래어는 히라가나ひらがな와 구분된 가타카나カタカナ로 표기해서 쓰고 있다. 이것은 자신들이 쓰고 있는 어휘에 대한 명료한 이해를 제공한다.

한자와 외래어를 넘나드는 그들의 언어생활은 매우 풍요로울 것이다. 정말 놀랄 정도의 수많은 서양 어휘들이 가타카나로 옮겨져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현명하고 실용적인 일본인들이다.

한글은 표음문자로서 ‘오노마토페onomatopee’라는 의성의태어가 매우 발달한 언어지만 명사가 턱없이 취약한 언어다.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을 나타내는 명사는 더욱 취약하다. 그래서인지 우리말의 명사, 특히 추상적 개념을 나타내는 명사는 거의 대부분 한자어이며, 이 중에서도 일본 사람들이 만든 소위 ‘일본제 한자어’가 수없이 많다. 많은 학문 용어들-사회, 문화, 혁명, 경제, 회사, 주식, 국민, 운동, 헌법 등부터, 일상생활용어들-구두, 야채, 인간, 시계, 충치, 건물, 호우, 방송, 생방송, 가격, 단어 등 다 열거할 수 없는 말들이 일본제 한자어다. 일본제 한자어는 우리만 쓰는 게 아니다. 한자의 종주국인 중국에서조차 학문 용어 중 반 이상이 일본제 한자어라 한다. 심지어 지금 중국의 국호인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인민’과 ‘공화국’도 일본제 한자어다.

한글이 우수한 언어임에 틀림없지만 한글만 우수한 것은 아니다. 왜 한글 전용을 고집하는가. 한글 전용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생각하는 힘을 약화시키고 있다. 언어는 곧 지성이고 국력이다. 피히테의 말대로 언어가 사람을 만들기 때문이다. 오늘 ‘글쓰기’ 창간에 부쳐서 주장해 본다. 한글과 함께 한자나 외래어의 중요성도 인식하고 배워야 한다고 말이다.

장시정 독일모델연구소 대표.
장시정 독일모델연구소 대표.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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